항목 ID | GC05601259 |
---|---|
한자 | 曺明洙 |
이칭/별칭 | 조떵어리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희순 |
출생 시기/일시 | 1907년 - 조명수 출생 |
---|---|
몰년 시기/일시 | 1937년 - 조명수 사망 |
출생지 |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잠정리 |
성격 | 국악인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조선 성악 연구회(朝鮮聲樂研究會) 외교 이사 |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출신의 가야금 명인.
[개설]
조명수(曺明洙)[1907~1937]는 태도가 곱고, 얼굴이 맑아 달덩이처럼 예쁘다고 하여 ‘조떵어리’ 또는 ‘조떵구’라는 애칭을 지니기도 했다. 슬하에 조순애가 있다.
[활동 사항]
조명수(曺明洙)는 가야금 산조와 풍류의 거장으로 다양한 국악기를 섭렵하였다. 조선 성악 연구회 외교 이사를 맡아보며 1936년 2월 9~11일 조선 성악 연구회의 가극 배비장전(裵裨將傳) 공연 때 출연했다.
1936년 선만(鮮滿) 교환 방송을 통해 가야금 병창·가야금 산조(散調)·「농부가」·「새타령」·「육자백이」 등 여러 곡을 방송하기 위해 경성 방송국에 출연하였고, 『조광(朝光)』[1937] 17호에 발표된 ‘조선 성악 연구회 현재 멤버’에 소개되었다. 일제 강점기 그가 취입한 민요 「농부가」·「성주풀이」는 일본 빅타 음반에 전한다.
조명수의 자녀인 조순애의 증언에 의하면 ‘아버지는 판소리 명창 김연수와 친구로 지냈고, 일제 때 영화 유충렬전에 왕으로 출연한 적이 있으며 영화 촬영 도중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다. 또한 그는 주로 서울에서 활동했다’고 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을 기울여 1935년 성금연에게 가야금 산조와 병창을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