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5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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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共匪討伐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광철 |
[정의]
1948년 10월부터 1955년 7월까지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이 전라남도 화순군을 무대로 활동하던 좌익 무장 세력과 인민군 패잔병을 토벌한 사건.
[개설]
빨치산이 화순 지역을 거점으로 삼은 데는 화순군의 산세가 험준하여 은신이 용이하고 산자락을 따라 마을이 산재해 현지 보급에 유리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산악을 통해 북쪽과 동쪽으로는 소백산맥, 서쪽으로는 노령산맥, 남쪽으로는 전라남도 장흥군과 보성군 등 주변 산지와 연결되어 이동로 및 통신선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역사적 배경]
화순 지역의 빨치산은 크게 두 시기에 걸쳐 활동했다. 전기는 1948년 14연대 반란 사건 이후 토벌군을 피해 전라남도 동부 산악 지대로 들어간 세력으로, 이들은 세칭 ‘구빨치산’ 혹은 ‘구빨치’라 불렸다.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입산했는데 입산 과정에서 화순군 백아면 백아산 일대에 일부가 은신했다.
후기는 6·25 전쟁 중 유엔군의 인천 상륙으로 퇴로가 막힌 전라남도 지역의 인민군과 좌익 세력이 입산하여 형성한 집단으로 이들은 구빨치산과 구별하여 ‘신빨치산’ 또는 ‘신빨치’라고도 했다.
1950년 9월 이후에 빨치산은 화순군 백아면의 백아산에 조선 노동당 전남 도당의 근거지를 마련했고, 예하의 무장 조직인 전남 총사령부도 화순군 백아면 수리에 거점을 두었다. 빨치산은 보급로 차단, 식량 탈취, 통신선 절단, 경찰지서 등 토벌 거점의 기습, 철도 파괴와 습격 등으로 6·25 전쟁 기간은 물론이고 휴전 협정 이후에도 후방에 상당한 위협을 가했다.
[과정]
14연대 반란군의 초기 진압은 광주 지역에 주둔한 4연대[곧 20연대로 명칭 변경] 등을 기반으로 한 토벌군 사령부가 수행했다. 토벌군은 반란 발생 9일 만에 여수를 탈환했고, 이후 반란군이 지리산 등 산악 지대로 이동하여 활동하자 20연대와 경찰이 투입되어 토벌에 나섰다.
1950년 9월 국제 연합군의 인천 상륙 후 퇴로가 막혀 화순군 등 산악 지대로 들어가 활동한 인민군과 빨치산에 대한 토벌은 크게 4단계로 실시됐다. 제1단계는 11사단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작전 기간은 1950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였다. 이때 화순 지역은 물론 호남 지역에 은신 중이던 빨치산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당시 화순 지역에 주둔했던 부대는 11사단 예하 20연대였다. 그 후 11사단은 1951년 2월 예하 9연대가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의 양민을 학살한 사실이 알려지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대구 지역으로 이동했다.
2단계는 전방에 있던 8사단이 투입되어 11사단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시작되었다. 작전 기간은 1951년 4월부터 5월까지였다. 이 무렵 빨치산은 화순 지역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지리산에 주력이 있어 화순 지역에서 8사단의 활동은 이전 11사단 때만큼 크지 않았다.
3단계는 1951년 6월부터 지리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활동이 재개되자 설치된 백야전 전투 사령부에 의해 수행됐다. 백야전 전투 사령부는 휘하에 수도 사단과 8사단 등 2개 사단을 두고 토벌에 임했다. 주로 지리산 일대에서 이현상이 지휘하는 남부군 토벌에 초점을 맞춰 화순군에서는 큰 여파가 없었다. 백야전 전투 사령부의 작전 기간은 1951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였다.
빨치산은 1955년 초엽 남한 전역을 5개 지구당으로 분할하여 운영했는데 호남 지역은 제5지구당으로 다른 지구당보다 빨치산이 가장 많이 은거했다. 하지만 그 수는 60여 명에 불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4단계는 빨치산의 이러한 활동에 대응하여 2군 사령부가 남부 지구 경비 사령부를 설치하면서 시작됐다. 남부 지구 경비 사령부의 주력은 서남 전투 경비 사령부로 대개 경찰 병력이었고, 1955년 2월부터 3월까지 활동했다. 1955년 3월 3일 화순 경찰대는 화순군 동면 경치리에서 빨치산 1명을 생포하고 4명을 사살했다. 한편 남부 지구 경비 사령부 해체 후에도 2,700여 명으로 편성된 경찰 기동대가 빨치산 잔당을 소탕했고 소탕전은 1955년 7월에 공식적으로 종료됐다.
[결과]
화순군의 빨치산은 1950년 12월까지 동복면·이서면·이양면에서 자취를 감췄고, 1952년 4월 백아산 전투로 빨치산의 주력은 대부분 와해되었다. 이후에도 잔당 소탕은 이어졌으며 경찰은 1955년에야 토벌 완료를 공식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