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717 |
---|---|
한자 | 南原梁氏 |
영어공식명칭 | Namwon Ya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광철 |
본관 | 남원 - 전라북도 남원 |
---|---|
입향지 | 우명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
세거|집성지 | 우명리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
세거|집성지 | 보산리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보산리 |
세거|집성지 | 공배리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공배리 |
성씨 시조 | 양주운 |
입향 시조 | 양천지 |
[정의]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 양주운을 시조로 하고 양천지를 입향조로 하는 세거 성씨.
[연원]
남원양씨의 원래 시조는 탐라국 개국 신화의 삼신인 가운데 한 사람인 양을나(梁乙那)이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양우량(梁友諒)이 왕실에 큰 공을 세워 남원백(南原伯)으로 책봉되어 남원을 관적으로 하여 시조가 됨으로써 양씨는 제주와 남원 두 관적(貫籍)[시조(始祖)가 난 곳. 관향(貫鄕)]으로 나뉘었고, 나중에 충주가 분관되어 세 관적이 있게 되었다. 남원양씨는 문헌의 실전으로 선조의 계보를 자세히 알 수 없어 양능양(梁能讓)의 병부공파(兵部公派), 양주운(梁朱雲)의 용성공파(龍城君派), 양수정(梁水精)의 대방군공파(帶方郡公派), 양윤위(梁潤渭)의 장영공파(章榮公派) 등으로 분화되어 각각 세계(世系)[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를 이어 왔다.
고려시대 남원양씨 인물로는 양진(梁稹)[?~1040]이 고려 현종 때 예부상서, 중추부사, 상서좌복야 등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양백익(梁伯益)은 공민왕 때 개성윤(開城尹)으로서 김용(金鏞)의 흥왕사(興王寺) 변란 진압과 경성을 수복하는 공을 세워 1등공신에 오르고, 첨의평리 등 고위직을 역임했다. 우왕 때는 왜구 토벌에도 공을 세웠다.
[입향 경위]
함양군 지역에 입향한 남원양씨는 양주운을 시조로 하는 용성군파 후손들로, 조선 세종 때 양천지(梁川至)[1396~1447]가 전라북도 옥구(沃溝)에서 함양으로 들어와 고을 동쪽에 위치한 우명(牛鳴)[지금의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효리마을]에 정착하여 입향조가 되었다. 양천지가 함양으로 입향하게 된 것은 함양오씨 오척(吳倜)의 사위가 되면서부터이다. 5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양용(梁湧), 양관(梁灌)[1437~1507], 양옹(梁澭), 양정(梁淨), 양경(梁澋)이다. 두 딸은 각각 김사정(金士楨)과 표현노(表賢老)에게 시집갔다. 양관은 무과에 합격한 후 덕천군수, 장흥부사를 역임하면서 청백리로 평가되었다. 양관의 손자 양희(梁喜)[1515~1580]는 1546년(명종 1)에 급제하여 정언·지평 등을 지내고 1568년 예빈시정 겸 춘추관편수관 자격으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581년에 동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병사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양천지의 함양 입향에 이어서 성종 때는 양유신(梁有信)이 아들 양팽구(梁彭耈)와 함께 전라북도 남원에서 들어와 송평(松坪)[지금의 함양군 병곡면 송평리 송평마을]에 거주하였다. 양팽구는 단양우씨 장군 우계근(禹繼根)의 사위이다. 철종 때는 양순기(梁順基)가 단성(丹城)[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에 있던 현]에서 들어와 하백(下栢)[지금의 함양군 함양읍 백연리 하백마을]에 정착하였고, 고종 때는 눌재 양성지(梁誠之)[1415~1482]의 후손 양주칠(梁柱七)이 남원에서 들어와 그 자손들이 죽곡(竹谷)[지금의 함양군 함양읍 죽곡리 죽곡마을]에 자리잡았다. 시기가 확인되지 않지만 시조 양주운의 17세손 양한조(梁漢祚)가 경상남도 합천에서 들어와 안의현 장자동(長者洞)[지금의 함양군 안의면 이전리 장자동]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현황]
1934년에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의 성(姓)』에서 함양의 남원양씨는 함양군 지곡면 공배리에 23세대,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에 21세대, 함양군 백전면 대안리에 18세대 규모의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남원양씨는 전국에 6만 7,691가구 21만 8,546명, 함양군에 241가구 58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2015년 조사에서는 전국에 30만 7,724명, 함양군에 564명이 살고 있다고 하였다. 2000년에 비해 남원양씨는 전국 차원에서 증가하였지만 함양군은 10여 명 줄어들었다. 함양군 함양읍 구룡리 구만마을·조동마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남계마을, 함양군 우명리 효리마을·가성마을, 함양군 지곡면 보산리 효산마을, 함양군 안의면 황곡리 신당마을 등은 남원양씨가 오래 전에 살았거나 현재 많이 살고 있는 마을들이다.
[관련 유적]
남원양씨 용성세고 목판(龍城世槁冊板)[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34호]은 1786년(정조 10)에 간행된 남원양씨 세고(世稿)로, 모두 70판의 완본이다. 1786년 문집 간행 당시 판각된 능화경판(菱花經板) 1판이 함께 소장되어 있다. 남원양씨 용성세고 목판은 남원양씨 재실인 공배마을의 영모재(永慕齋)에 소장되어 있다. 서문은 윤광소(尹光紹)[1708~1786]가 썼다. 권1에는 양천지·양관·양응곤(梁應鯤)·양희, 권2에는 양홍수(梁弘樹)·양부(梁傅)·양황(梁愰)이 실려 있다. 부록에는 양관 행장, 정온(鄭蘊)[1569~1641]이 쓴 양희 신도비명 등이 실려 있다. 당시 남원양씨 가문의 내역이나 교류한 인물들의 관계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