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495
한자 咸陽坪村里信古堂神道碑-夫婦墓表
영어공식명칭 Hamyang Pyeongchon-ri Singodang Memorial Stone and Couple Grave Mark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평촌리 산 32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동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12년 7월 12일연표보기 - 함양 평촌리 신고당 신도비 및 부부 묘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0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함양 평촌리 신고당 신도비 및 부부 묘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
현 소재지 함양 평촌리 신고당 신도비 및 부부 묘표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평촌리 산32 지도보기
성격
관련 인물 노우명
소유자 풍천노씨 이로각(履露閣) 종중
관리자 풍천노씨 이로각(履露閣) 종중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평촌리에 있는 신고당 노우명의 신도비와 그 부부의 묘표.

[위치]

옥계(玉溪) 노진(盧禛) 신도비의 위쪽에 있다. 신도비는 남향으로 안장된 노우명(盧友明)[1471~1523] 부부 쌍분의 축대 아래의 동쪽에서 서향으로 서 있다. 묘표는 각각의 분묘 정면에 남향으로 서 있다.

[변천]

신도비는 노우명의 아들 노진이 이조판서를 지내게 되자 증직되어 1577년(선조 10)에 조성되었으며 이후 변화 없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형태]

신도비 귀부(龜趺)의 용두(龍頭)는 익살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귀미(龜尾)는 굵게 귀갑 쪽으로 올라가 있어 다소 둔해 보인다. 이수(螭首)는 방형이고, 앞뒤로 여의주를 다투는 용의 형상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그 위에 보주가 있다.

[금석문]

신도비의 첫머리에는 “증이조판서 노공신도비명(贈吏曹判書盧公神道碑銘)”이라 전(篆)이 되어 있고, 비의 제목[碑題]은 “유명 조선국 종사랑 행현릉참봉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겸지의금부사 노공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從仕郞行顯陵參奉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盧公神道碑銘幷序)”이다. 신도비는 전면의 오른쪽부터 비의 제목과 찬자인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의 이름, 글씨를 적은 당시 최고의 서예가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의 이름, 두전했던 호조참판 남응운(南應雲)의 이름이 각각 1행씩 배치되어 있다.

서문(序文)은 19행(각행 60자)으로 되어 있고, 명(銘)은 2행(20구 80자)으로 되어 있으며, 마지막 행에는 비를 세웠던 연월(年月)을 기록하였다. 또한 비신의 후면에는 노우명의 둘째 아들인 노진이 적은 10행(각행 20자)의 비음기가 있다.

전면에 2행으로 된 노우명의 묘표는 ‘종사랑 행현릉참봉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겸지의금부사 노공지묘(從仕郞行顯陵參奉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盧公之墓)’라 새겨졌는데, 하단의 ‘증자헌대부’와 ‘사노공지묘’의 10자는 떨어져 나가 판독이 어렵다. 노우명 부인 묘표는 ‘정부인 권씨지묘(貞夫人權氏之墓)’로 되어 있다.

[현황]

신도비는 묘소의 동남쪽 대로변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나 신고당의 신도비는 묘전에 있어서 묘갈명의 성격을 겸하고 있다. 신도비와 묘표는 1577년(선조 10)에 조성된 이후 전혀 보수가 없었기 때문에 신도비나 묘표의 아래 부분은 판독이 어렵다. 함양 평촌리 신고당 신도비 및 부부 묘표는 2012년 7월 1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0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노우명일두 정여창의 문인이고 그의 아들 옥계 노진은 남명 조식과 함께 일두의 학문 정신을 계승하였던 사람이다. 신고당은 경상우도 학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로 임진왜란 이전에 건립된 그의 신도비는 희소성이 높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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