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249
한자 咸陽郡邑誌
영어공식명칭 Hamyangguneupji
이칭/별칭 『경상남도함양군읍지』,『진주진관함양군읍지』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단행본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재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편찬 시기/일시 1899년연표보기 - 『함양군읍지』 편찬
소장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서울시 관악구 관악로1[신림동 산 56-1]
성격 향토지
간행자 함양군
표제 경상남도함양군읍지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여 1899년에 편찬된 향토지.

[편찬/간행 경위]

19세기 후반에는 지리지를 많이 편찬하였다. 1871년에 편찬된 지리지가 군사 목적이 강조되었다면 1895년에 제작된 지리지는 각지의 재정을 파악할 수 있는 항목들이 강조되어 제작되었다. 특히 1896년 전국의 23부 체제가 13도 체제로 바뀌었는데 이러한 지방제도 개혁 후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지리지가 바로 1899년에 제작된 지리지들이다. 『함양군읍지』의 편찬 시기에 관한 단서는 이 읍지의 형태와 인장이다. 읍지의 책 크기, 종이 재질, 판식은 1899년에 편찬된 읍지들과 유사하다. 이러한 점에서 이 읍지의 편찬 시기를 1899년으로 판단하였다.

[서지적 상황]

『함양군읍지』는 1책 31장의 필사본으로,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표제는 ‘경상남도함양군읍지(慶尙南道咸陽郡邑誌)’로 되어 있고, 내제는 ‘진주진관함양군읍지(晉州鎭管陽郡邑誌)’이다.

[형태]

크기는 세로 52㎝, 가로 29㎝이다. 필사본이며, 1책 3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재질은 표지의 경우 황지(黃紙), 본문은 닥나무종이[저지(楮紙)]이다. 단색 지도 1장 2면이 첨부되어 있다.

[구성/내용]

『함양군읍지』는 건치연혁(建置沿革)부터 비판(碑板)에 이르기까지 44개 항목으로 구분하여 함양군의 현황을 체계화하였다. 항목 구성은 건치연혁, 군명(郡名), 관직, 성씨, 산천, 풍속, 방리(坊里)[마을], 호구, 한전(旱田)[물을 대지 않거나 필요한 때만 물을 대어서 야채나 곡류를 심어 농사를 짓는 땅], 수전(水田)[물을 쉽게 댈 수 있는 논. 무논], 결총(結總)[조선 시대에 토지세 징수 기준이 된 논밭 면적의 전체 수], 군액(軍額)[군량미 양], 성지(城池), 창고, 관방(關防)[변방 방비를 위하여 설치한 요새], 전선(戰船), 진보(鎭堡), 주즙(舟楫), 봉수(烽燧), 학교(學校), 단묘(壇廟), 총묘(塚墓), 불우(佛宇), 공해(公廨), 누정(樓亭), 도로, 교량, 도서, 제언(堤堰), 장시(場市), 역원(驛院), 목장, 형승(形勝), 고적(古蹟), 토산, 진공(進貢), 봉름(俸廩)[조선 시대에 벼슬아치에게 주던 봉급], 환적(宦蹟)[벼슬살이를 할 때의 행적], 과거(科擧), 음사(蔭仕)[과거를 거치지 아니하고 조상의 공덕에 의하여 맡은 벼슬. 음관(蔭官)], 생진(生進)[생원과 진사], 인물, 제영(題詠)[제목을 붙여 시를 읊음], 비판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함양군의 역사, 소속된 면리의 명칭, 관직, 산천을 포함한 자연환경, 물산, 시설의 위치 및 내력 인구수 및 토지 규모 등의 재정 내역, 인물 정보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함양군읍지』에 기록된 호구와 전결의 수로 볼 때 함양은 조선의 지방 고을들 가운데 다소 작은 고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함양군읍지』는 이전 시기에 작성된 읍지를 참고하면서도 경제 지표를 나타내 주는 호구, 전결, 전세(田稅) 등에서 수치 변화와 같은 변동 사항을 항목별로 반영하고 있어 광무 연간 지방 행정 체계가 갖추어 가던 시기와 이전 시기를 비교 검토할 수 있다. 또 조선 후기 함양의 사회·경제 변화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인물과 비판조의 내용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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