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11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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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定奎 |
영어공식명칭 | Jo Jeonggyu |
이칭/별칭 | 백양(伯陽)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박종순 |
[정의]
경상남도 함안군 출신의 한국화가.
[활동 사항]
조정규(趙定奎)[1892~1966]는 1892년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백양(伯陽)이다. 서당과 여항산의상대에서 한학을 배운 후, 서울 경신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신간회 활동을 하며 항일 운동을 펼치다 함안군 군북면하시장(下市場)에서 일어난 만세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토목 공학을 공부하여 토목 기사 자격을 취득하기도 하였다. 그 후에 다시 피신하여 중국, 만주, 소련, 체코, 유고슬라비아 등을 유랑하였다.
1933년 건강상의 문제로 금강산유점사에서 요양을 하게 되는데, 이때 주지승으로부터 사군자를 배우면서 그림을 시작하였다. 마침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의재허백련 화백을 광주에서 만나 그와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38년 허백련을 중심으로 연진회(鍊眞會)를 창립하고 그림에 정진하게 되었다. 1939년 제18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호산청하(湖山淸夏)」로 입선하였다. 그 작품이 엽서로 채택되어 한국과 일본 전역에 널리 쓰이게 되면서 이름을 알렸다. 그 후 선비의 높은 기개와 정신을 산수화로 승화시킨 「춘산백운」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을 남기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였다. 서울 인사동, 광주, 부산, 마산, 진주, 함안 등지에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소치허련, 의재허백련을 이어 남종 산수화의 맥을 잇는 한국화가로 입지를 다졌다.
8·15 광복이 되자 조정규는 함안으로 귀향하여 농민 운동을 하며, 초대 농민 조합장으로서 농민 권익 운동에 앞장섰다. 6·25 전쟁이 끝난 후에는 당시 유엔군에 의해 초토화된 마을의 복구를 위한 보상비 청구를 유엔 사령부에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함안 중학교에서 미술과 한문을 가르치는 교사로 일하고, 법수 사립 중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재직하였다. 퇴직 후에는 다시 전업 화가의 길을 걷다가, 1966년 74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저술 및 작품]
조정규는 함안 최초의 동양화가이자 남종 문인 화가이다. 해외를 유랑하다가 금강산에서 요양하던 중 사군자로 그림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중국당나라왕유로부터 시작하여 의재허백련까지 이어져 온 남종 산수화의 오랜 전통을 물려받았다. 조정규는 남종 산수화의 기본 정신을 따르면서도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보여 주었다. 기존의 남종 문인화에서 추구한 미적 가치인 담박[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함], 소쇄[기운이 맑고 깨끗함]와 더불어 일제 강점기를 의연히 살아간 선비의 기개를 느끼게 하였다. 또한 실제의 장면을 연상시키는 묵필의 치밀함까지 보여 주었다. 전지 크기의 작품 「심산유곡도」를 보면, 실제적인 장면을 연상케 함으로써 묵필의 치밀함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화가의 마음을 담은 정감 어린 풍경으로도 다가온다. 백양의 예술은 아름답고 빼어난 한국의 산하를 자기 특유의 미적 감수성과 지사적 기개에 융합시키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수묵 본연의 전통적 필묵 속에 녹아들어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대사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39년 제18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호산청하」로 입선하였다. 한편 산수화, 매화, 10곡 병풍, 8곡 병풍, 2곡 병풍 등의 유작 19점과 소장하고 있던 예술품 12점 등 총 31점을 함안군에 기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