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1088 |
---|---|
한자 | 二靈 敎會 |
영어공식명칭 | Iryeong Presbyterian Church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이령3길 26[이령리 234-8] |
시대 | 근대/개항기,현대/현대 |
집필자 | 조규통 |
[정의]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소속 교회.
[설립 목적]
이령 교회는 자손의 번창과 함께 질병을 고치고, 학교 교육 등과 함께 주변에 복음을 전파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이령 교회 최초 설립자로 알려진 김세민이 예수를 믿기 전 그 모친 김성아가 예수를 먼저 믿었다. 김성아는 39세에 2대 독자였던 남편을 잃었고, 1남 2녀를 낳았던 며느리도 잃었다. 그러던 중에 김해 김씨 종친회 회비를 받으려고 나타난 조카 김선약에 의해 새로운 종교에 대한 이야기 듣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자신의 손아래 동서인 이성근 및 다른 여성인 복음 노인(福音老人)과 함께 집에서 예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 여성이 글을 잘 알지 못해 김세민이 교회에서 전달한 전도지와 낱복음[쪽지로 된 작은 성경]의 글을 읽어주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세민도 예수를 믿게 되었고, 이것이 칠북이령 교회의 시작이었으며, 일명 칠원 연개(蓮浦) 교회라고도 하였다. 즉, 1897년 김성아와 2명의 여성을 위해 김성아의 아들 김세민이 사랑방에서 기독교 전도 문서를 읽어주면서 이령 교회가 시작된 것이었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에는 1899년 함안이령 교회가 김세민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00년 봄에는 김정오가 처음 유아 세례를 받았다. 지역의 계몽을 위해 경명 학교를 설립하였다. 1916년 김세민이 영수로 시무한지 20년 만에 경상 노회에서 장로에 임직되고, 이령 교회 당회가 조직되었다. 1936년에 이령 예배당을 근대식으로 신축하고, 헌당식과 함께 김세민 장로의 제직 40년[영수 20년 포함] 표창식을 거행하였다. 김정오는 이날을 기념하여 덕촌 성(成)부자의 기와집 4칸을 교회 사무실로 옮겨서 짓고 헌납하여 삼안당(三安堂)이라 이름 지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이령 교회는 1904년 초대 교장을 김세민으로 하는 경명 학교를 설립하여 지역의 많은 아동들이 입학해서 공부할 수 있게 했다. 이후 경명 학교는 일제에 의해 이령 국민학교로 통합되며 자연 폐교되었다. 또한 이령 교회는 김세민의 사위 배성두 열사[김세민의 장녀 김복남과 결혼]의 활동을 통해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했고, 1919년 3월 9일에는 경상남도 지역 최초의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당시 이 지역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했던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가 일제의 의도적인 정책에 의해 도태되어 갔다. 한편 2013년 12월에 김세민의 손자인 김상윤[고신대 유아 교육학과 교수]에 의해 경명 학교가 재개교하여 선대의 신앙에 입각한 어린이 교육을 모토로 운영 중에 있다.
[현황]
이령 교회는 산업화와 도시화의 영향으로 현재는 조그만 목조 양식의 아름다운 시골 교회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성전 건축 평안하여 든든해지는 교회’라는 표어를 실천하고 있으며, 인근 마을 주민들을 위한 봉사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아울러, 김상윤 교수에 의해 재개교한 경명 학교가 인성 교육과 자연 친화 교육에 뜻이 있는 부산경남 지역의 유치원, 어린이집 원장, 교사들의 참여로 활기를 띠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령 교회는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서 복음 전파와 나라 사랑이 결코 양분될 수 없음을 뚜렷한 행적으로 남긴 교회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