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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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洪濟 |
영어공식명칭 | Jo Hongje |
이칭/별칭 | 만우(晩愚)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954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구경렬 |
[정의]
경상남도 함안군 출신의 기업인.
[가계]
본관은 함안(咸安). 호는 만우(晩愚). 생육신의 한 사람인 어계(漁溪)조려(趙旅)의 18세손이다. 아버지는 조용돈이고, 어머니는 안부봉이며, 부인은 하정옥이다.
[활동 사항]
조홍제(趙洪濟)[1906~1984]는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에서 태어났다. 7세 때 글공부를 시작했고, ‘백세청풍(百世淸風)’을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15세 때 1년 연상의 하정옥과 결혼하였고 19세 때 중앙 고등 보통 학교에 입학하였다. 1926년 6·10 만세 운동으로 학교를 퇴학당하기 전까지 응원 단장을 맡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교를 거쳐 1935년 나이 30세에 동경대학교 법정 대학을 졸업하였다. 고향인 함안으로 돌아와 군북 금융 조합장을 9년간 맡았고, 군북 산업을 설립하였다.
1948년 서울에서 삼성 그룹 창업자 이병철과 1,700만 원으로 삼성 물산 공사를 창업하였고, 15년간 삼성에서 제일 제당, 제일 모직을 비롯한 초창기 삼성의 산파 역할을 하였다. 1962년 9월 56세의 늦은 나이에 임직원 15명으로 효성 그룹의 모태인 효성 물산을 출범시켰다. 조홍제는 훗날 삼성을 떠나 효성을 창업한 일을 일생의 가장 현명한 결단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이후 “사람이 일의 성패를 좌우한다.”, “기업은 곧 사람이다.” 등 일관되게 인재 제일주의를 지향하였다. 1966년 동양 나이론을 설립하였고, 1970년 한일 나이론을 인수하였다. 1973년 동양 폴리에스터를 설립한 데 이어 동양 염공을 설립하였다. 1975년 효성 중공업을 설립하였다.
1921년 개교한 군북 국민학교 교문에 들어서면 좌우에 조홍제와 관련한 흔적이 남아 있다. 한쪽에는 6·25 전쟁 때 불타 버린 교실을 다시 마련해 준 것을 기리기 위해 고향 사람들이 세운 ‘은공 불망비’가 있고, 또 한쪽에는 1974년 강당을 건립, 기증하면서 후배들에게 ‘바르게 배우고 튼튼하게 자라다오’라고 당부한 것이 있다. 1959년 배명 학원 이사장, 1976년 동양 학원 이사장, 전국 경제인 연합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는 등 교육과 사회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1년 최우수 경영자 상[고려 대학교]을 수상하였고, 1975년 11월 동탑 산업 훈장[제12회 수출의 날], 1976년 금탑 산업 훈장[제13회 수출의 날]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