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8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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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河相運 |
영어공식명칭 | Ha Sangun |
이칭/별칭 | 하칠룡(河七龍)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구포3길 27-3[구포리 687]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신은제 |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하상운(河相運)[1898~1961]은 1898년 11월 함안군 칠서면 구포리에서 태어났다. 슬하에 하동수(河東秀)라는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함안군 칠서면 구성리에서 거주하였다.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3·1 운동에 참여한 함안 사람 조한휘(趙漢輝) 등은 귀향한 후 대산면에 사는 한문 교사 안지호(安知鎬)와 더불어 함안 장날인 3월 19일 만세 시위를 계획하여 실행에 옮겼다. 하상운 등은 봉성동(鳳城洞)에 모인 수백여 명의 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나누어 주고 만세 운동을 시작하였다.
3,0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여 공문서 등을 소각한 뒤 군청으로 나아가 친일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제복을 벗기는 등의 모욕을 주었다. 이어 시위대는 등기소, 우체국, 일본인 소학교 등을 공격하였으며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 사건으로 하상운은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하상운은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소요, 보안법 위반 명목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 받고 마산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하상운은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이 인정되어 1997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