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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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琮植 |
영어공식명칭 | Bak Jongsik |
이칭/별칭 | 학명(學明),박재신(朴在新),박영부(朴榮夫)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외암길 199[외암리 570]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주용 |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박종식(朴琮植)[1896~1950]은 자는 학명(學明), 족보에 오른 이름은 박재신(朴在新)이며, 박영부(朴榮夫)라고도 불렸다. 아버지는 박만혁(朴萬爀)이고, 큰아버지 박만희(朴萬熙)에게 입양되었다. 아들은 박성종·박성효·박두종, 손자는 박영수·박영욱·박영희이다. 독립운동가 안재형(安在瑩)이 매형이다.
[활동 사항]
박종식은 1896년 9월 15일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에서 태어났다. 1910년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에 있는 단군교(檀君敎)를 통하여 나라를 찾기 위한 힘을 기르는 주체를 만들려는 의도로 입교하였다. 함안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봄 서울 사립 중앙 학교 중등 야학교(中等夜學校)에서 교육을 받았다. 서울에서 중학교 과정을 이수하던 중 만주로 망명하였다. 독립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1916년 5월 서울에 거주하는 친일파 부호 민영휘(閔泳徽)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하는 서한을 발송하였다.
편지에는 “거사에 찬성하고 이에 요구되는 비용의 제공을 허락할 것이요, 만약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토멸대를 조직하고 와서 징벌을 가할 것이다. 정안(正眼)과 정재(正財)로써 정의의 사업에 사용하지 않고 비열한 사업을 하는 자는 징벌을 하더라도 도리에 통하고 천리(天理)에 합치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박종식은 이 일로 체포되어 공갈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 1919년 서울에서의 독립 만세 시위 소식을 듣고 1919년 3월 안재원, 안재옥 등 함안군 여항면 유림과 동명 학교의 대종교를 신봉하는 이희석(李喜錫), 안영중과의 연락책이 되어 함안읍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매형인 안재형의 도망 가라는 다급한 요구에 피신하여 옥고는 면하였다. 이후 상해 임시 정부 군자금 모집책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경 마산 등지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자금 모집책 송두환(宋斗煥)과 함께 활동하였다. 그해 음력 12월 23일 경상북도 경찰부 고등 경찰과에 검거되어 두 달 동안 혹독한 취조를 받았지만, 부인과 묵비권을 행사하여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23년 또다시 독립운동 자금 모집책으로 활동하다가 1924년 1월경 체포되어 부산 지방 법원 진주 지청에서 강도죄로 징역 7년 형을 선고 받고 옥살이를 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8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