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7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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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澐 |
영어공식명칭 | O Un |
이칭/별칭 | 태원(太源),죽유(竹牖),죽계(竹溪),백암 노인(白巖老人),율계(栗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류진희 |
[정의]
조선 전기 함안 출신의 문신이자 의병장.
[가계]
본관은 고창(高敞). 자는 태원(太源), 호는 죽유(竹牖)·죽계(竹溪). 할아버지는 전의 현감을 지낸 오언의(吳彦毅)로 퇴계(退溪)이황(李滉)의 숙부 송재(松齋)이우(李堣)의 사위이다. 아버지는 오수정(吳守貞)이며, 어머니는 취우정(聚友亭)안관(安灌)의 딸이다. 부인은 이황의 처남 몽재(蒙齋)허사렴(許士廉)의 큰딸로, 이황에게는 처질서가 된다.
[활동 사항]
오운(吳澐)[1540~1617]은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에서 태어났다. 19세 때 김해산해정(山海亭)으로 조식(曺植)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으며, 25세 때는 도산 서당(陶山書堂)으로 이황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1566년(명종 21)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직강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충주 목사·사성·광주 목사 등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큰 공을 세운 후 상주 목사와 합천 군수를 지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합천 부근의 왜적을 격멸하여 도원수 권율(權慄)의 추천으로 통정대부에 오르고,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의 접반사로 활약하였다. 1599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장례원 판결사로 승진하였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08년 다시 경주 부윤이 되었다. 1616년(광해군 8) 공조 참의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때 시정(時政)의 득실을 진언하였다. 1617년(광해군 9) 78세 때 청송 부사로 재임 중 병이 심해져 2월에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와 3월 경상북도 영주 본가에서 별세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에 『동사찬요(東史纂要)』·『주자 문록(朱子文錄)』·『용사 난리록(龍蛇亂離錄)』이 있고, 문집으로 『죽유집(竹牖集)』이 있다.
[묘소]
묘는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 3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임진왜란 때 세운 공을 인정받아 선무 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고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영주산천 서원(山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사후 광해군이 내린 제문(祭文)에 “도덕은 퇴도(退陶)를 존모하고 학문은 산해(山海)를 으뜸으로 삼았다.”라고 칭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