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7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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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鍾彰 |
영어공식명칭 | An Jongchang |
이칭/별칭 | 치행(致行),희재(希齋)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영동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경아 |
[정의]
개항기 함안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치행(致行), 호는 희재(希齋). 시조 안방걸(安邦傑)의 12세손인 안수(安綏)가 함안군 안인리(安仁里)에 정착하였다. 졸암(拙庵)안여거(安汝居)가 현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영동리로 이주하면서 광주 안씨(廣州安氏)는 대대로 영동리에 살게 되었다. 교관에 추증된 도곡(道谷)안정(安侹)의 10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안민중(安珉重)이고, 할아버지는 안효순(安孝純)이다. 아버지는 안진원(安鎭遠)이며, 어머니는 조양식(趙陽植)의 딸 함안 조씨(咸安趙氏)이다. 부인은 노연흠(盧演欽)의 딸 장연 노씨(長淵盧氏)이다. 아들은 안정수(安挺洙)이고, 사위는 조용수(趙鏞修), 조용섭(趙鏞燮)이다.
[활동 사항]
안종창(安鍾彰)[1865~1918]은 칠원현 배영리[현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영동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족숙 안기원(安冀遠)에게 배우다가 1898년(고종 35) 만구(晩求)이종기(李種杞)에게 수학하였다. 곽종석(郭鍾錫), 이승희(李承熙), 조정규(趙貞奎), 조병택(趙昺澤), 김병린(金柄璘), 배문창(裵文昶) 등 당대의 대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신학문이 들어오자 이를 반대하다 투옥되기도 하였다. 영사재(永思齋)에서 강학할 때 「영사재 월삭 강규(永思齋月朔講規)」, 「관동수지(冠童須知)」, 「훈몽구조(訓蒙九條)」 등을 지어 제생들을 면려하였다. 족인 및 지인들과 함께 이이계(以以契)를 결성하여 매년 3월 원근의 사우들과 모여 강학하고 향음주례를 시행하였다. 또 족숙 안병원(宋秉遠)의 유지에 따라 배영동에 의학 서당(義學書堂)을 지어 강학 활동을 하였다.
[학문과 저술]
10대조 안정(安侹)의 『도곡집(道谷集)』과 족숙 안병원(安秉遠)의 『소와 실기(蘇窩實記)』 등을 편수하고, 족숙 안기원(安冀遠)의 『귀음집(龜陰集)』을 간행하였다. 저서로 8권 4책의 『희재집(希齋集)』이 있다.
[묘소]
1918년 10월 14일 세상을 떠나 명봉산(鳴鳳山)에 가장(假葬)하였다가 1919년 10월 13일 칠북면 영동리의 선영 유좌(酉坐)로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