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5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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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剛齋集 |
영어공식명칭 | Gangjaejip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병철 |
[정의]
조선 후기 함안 출신의 학자 정재현의 시문집.
[저자]
정재현(鄭再玄)[1765~1846]의 자는 화신(和信), 호는 강재(剛齋)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5대조 정문례(鄭問禮)가 처음으로 진주에서 함안 죽계로 이거하였으며, 백이산 아래 지두촌(池頭村)에 정자를 지었다. 아버지 장만교(鄭萬僑)는 이계(夷溪)황도익(黃道翼)[1678~1752]에게 수학하였으며, 황도익의 아들 이봉(夷峰)황후간(黃後幹)과 함께 절차탁마하였다. 어머니는 강희로(姜姬老)의 딸인 진양 강씨이다. 부인은 정우창(鄭宇昌)의 딸인 진양 정씨이며, 그 사이에 3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정기인(鄭基仁), 정기직(鄭基直), 정기익(鄭基益) 등이며, 사위는 조건식(趙建植), 이상신(李尙新), 황하기(黃夏基) 등이다.
정재현은 1765년(영조 41)에 출생하였다. 총명한 자질을 타고나 7~8세 때 독서할 적에 몇 번 읽으면 곧 외우곤 했다. 집안의 가학을 계승하였으며, 일찍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깊이 연구했는데, 「중용 변의(中庸辨疑)」와 「대학 변의(大學辨疑)」를 지어 두 책에 관한 경학설을 남겨놓았다. 1846년 별세하여 두릉(杜陵)광려산(匡廬山) 아래에 장례를 지냈다.
[편찬/간행 경위]
『강재집(剛齋集)』은 1922년에 정재현의 현손 정병권(鄭丙權)이 선조의 시문이 유실될까 염려하여 간행을 주도하였으며, 친족 정윤빈(鄭潤彬)과 인척 이영호(李英浩) 등이 협력하여 간행하였다. 문집의 마지막 장에 '신유년[1922년] 모춘[3월] 죽산재활인(竹山齋活印)'이라는 간기를 남겨 놓았다. 서문은 조병규(趙昺奎)가 지었으며, 발문에는 이훈호(李熏浩)와 정병권이 지은 2편의 글이 있다.
[형태/서지]
2권 1책의 목활자본이다. 판식은 사주 쌍변(四周雙邊)으로, 계선(界線)이 있으며, 상하 이엽 화문 어미(上下二葉花紋魚尾)이다. 크기는 가로 18.5㎝, 세로 27.3㎝이며, 반곽의 크기는 가로 14.7㎝, 세로 18.5㎝이다. 1면 9행에 1행의 자수는 18자이다. 주(註)는 쌍행(雙行)이다. 권수제와 판심제는 '강재집(剛齋集)'으로 되어 있다.
[구성/내용]
권1의 첫 부분에는 세계도(世系圖)를 게시했는데, 정재현은 시조로부터 32세손이다. 그 다음에는 오언 율시, 오언 고시, 칠언 절구, 칠언 율시 순으로 시를 수록했다. 편지(便紙) 2통, 제문(祭文) 2편, 가장(家狀) 1편, 발문(跋文) 1편, 잡저(雜著) 4편 등이 실려 있다. 발문은 정재현이 1846년에 편찬한 『경주 정씨 유행록(慶州鄭氏儒行錄)』에 관한 글이다. 잡저는 「언행계(言行誡)」, 「분욕계(忿慾誡)」, 「중용 변의」, 「대학 변의」 등이다. 권2는 부록으로, 정재현과 관련한 만시(輓詩), 가장, 행장(行狀), 묘갈명(墓碣銘), 묘지명(墓誌銘) 등이 붙어 있다.
[의의와 평가]
18세기 경상우도 지역은 남명학파의 침체로 인해 관련 기록이나 문집이 매우 적다. 정재현은 18세기 중반에 출생하여 19세기 전반기까지 활동한 학자로, 정재현의 문집에는 학문과 수양에 관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강재집』은 그 자체로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활동한 시기의 자료 부족을 고려할 때 그 의미가 더욱 크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