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353 |
---|---|
한자 | 人民 解放軍 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양미숙 |
[정의]
1946년에서 1947년 사이 인민 해방군에 의한 함안 및 부산 지역의 공산화 기도 사건.
[개설]
인민 해방군(人民解放軍)은 남조선 노동당(南朝鮮勞動黨)[남로당]의 강진(姜進)·문갑송(文甲松)·한인식(韓麟植)[또는 한진식] 등을 수반으로 1946년 2월부터 조직되어 비밀리에 활동하였다. 이들은 김일성(金日成)·김두봉(金枓奉)·허가이(許哥而) 등의 연락과 지령을 받아 활동하였다.
[역사적 배경]
남한의 공산화를 도모하고 당시 제도를 전복하고자 민족진영을 없애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던 세력이 미소 공동 위원회의 결렬과 불리한 국내외 정세를 인식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무장 봉기의 군사적 행동으로만 정권을 획득할 수 있다고 판단해 인민 해방군을 조직해 활동하였다.
[경과]
한인식은 1947년 3월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경상남도 군사 위원회를 조직하여 총참모장으로 취임하였다. 사령관 김갑수(金甲壽)·병사 부장 장세식(張世武)·정치 부장 이영근(李英根)·훈령 부장 김석진(金碩鍾)·정보 부장 김태영(金台榮)·군자금 조달 책임 한인식 등으로 조직하였다. 점차 확대 강화하여 부산·동래·진주·사천·통영·남해·함안 등지에 연대 단위를 조직하고 정보대·후보대·자위대·특공대·전령대·정찰대·정치 공작대·무기 제조반·조사반 등의 세부 조직을 구성하였다. 또한 각 도 군사 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1947년 8월말까지 조직 총 동원 수 830명, 공작 대원 763명, 영도 군중 3만 6000명으로 확대하였다.
이들은 중국 유격대 소개서, 김일성 투쟁사, 붉은 군대 활동 상황을 활용하여 공산주의 선전, 정치 선동, 정보 수집 활동과 군사 훈련을 진행하였다. 이들의 활동 중 정보 사업으로는 미군 군정 정찰, 우익 정당책 등으로 정보 수집 6,024건, 조사 사업으로는 미군 물자 창고, 필수품 창고, 경비 상황 등의 세밀한 조사가 있다. 또한 군사 기본 훈련을 비롯하여 공방전(攻防戰), 시가전(市街戰), 편의대(便衣隊), 산악전을 훈련하였다. 1947년 10월 12일에는 경상남도 동래범어산 뒷산에서 군사 훈련 부장 김석종의 지도로 선발 대원 50여 명을 훈련하고 군자금과 무기 획득을 위해 부자와 경찰관을 살해하기로 계획하였다.
[결과]
인민 해방군 활동 과정에서 제7관구 경찰청[부산]에 탐지되어 일당 400여 명을 검거하였다. 취조 중 157명을 송치하였고 인민 해방군 관계 국방 경비 대원 45명은 군법 회의에 회부하였다. 조직원이 검거됨으로써 그 전모가 밝혀지고 조직이 와해되었다. 함안에서 검거된 사람은 구동부(具東扶)를 비롯해 91명에 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