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3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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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現代 |
영어공식명칭 | Contemporary Time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양미숙 |
[정의]
1945년 광복 이후 현재까지의 경상남도 함안 지역 역사.
[개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상남도 함안의 인구, 지역, 행정, 사회 문화 등 많은 변화가 있어 왔다. 다양하게 변화하는 사회에 맞춰 경상남도 함안 지역의 변화도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경상남도 함안군은 현재 가야읍(伽倻邑)을 중심으로 함안면(咸安面), 군북면(郡北面), 법수면(法守面), 대산면(代山面), 산인면(山仁面), 여항면(艅航面)과 1906년 통합된 칠원읍(漆原邑), 칠서면(漆西面), 칠북면(漆北面) 등 2개 읍 8개 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함안 군청은 1950년 6·25 전쟁으로 소실되어 1954년 11월 12일에 군청 소재지를 함안면에서 가야면으로 이전하였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로 대산면의 산서리를 가야면에 편입시켰고,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로 가야면이 가야읍으로 승격되었다.
1980년 5월 22일 군 조례 제484호로 군북면월촌 출장소를 설치하였으며, 1982년 9월 1일 조례 제643호에 의하여 가야읍 말산리에 중앙동을, 함안면 괴산리에 득성동을 설치하였으며, 군북면 덕대리에 지두동을, 모로리에 여명동을 설치하고 장지리의 장지동을 남산동과 장명동으로 분동하고 유현리에 봉덕동을 설치하였다. 또한, 칠원면 유원리의 유원동을 유상동과 유하동으로 분동하였으며, 1982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 행정 구역 변경으로 칠북면의 운서리와 운곡리가 칠원면에 편입되었다. 1989년 1월 1일에 대통령령 제12557호에 의거하여 산서 출장소가 경상남도 마산시로 편입되고, 1991년 4월 11일에는 군 조례 제1212호에 의거하여 함안군 가야읍 말산리 중앙동을 중앙 1동과 중앙 2동으로 분동하고 1993년 7월 15일 군 조례 제1273호에 의거하여 가야읍 당산동이 당산 1동과 당산 2동으로 분동되었다. 1999년 군북면월촌 출장소가 폐지되면서 1읍 9면이 되었고, 2015년 1월 칠원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2016년 9월 현재 관할 행정 구역은 2읍 8면, 251개 리 892개 반이다.
경상남도 함안군의 인구 동향은 광복 이후부터 1960년대 전반까지 계속 증가되어, 1965년에는 12만 5636명으로 현재까지 최고의 인구 성장을 보였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인구가 급속히 감소하여 1990년도에는 5만 9820명으로 1965년에 비해 무려 52.3%의 감소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2005년을 기점으로 인구가 증가 추세에 있다. 현재 기업체와 아파트가 계속 증가되고 있고 인근 도시 지역으로 출퇴근이 가능한 주거 지역으로서의 특성을 살려나가고 있어, 앞으로 인구가 증가될 것으로 전망된다.
[광복 직후의 함안]
광복이 된 후 1946년 초부터 경상남도 함안은, 진보 세력과 젊은층 중심의 좌익 진영과, 보수 세력과 중년층이 중심이 된 우익 진영으로 나뉘어졌다.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북촌리의 경우 한 마을 주민 다수가 남조선 노동당[약칭 남로당]에 가입했는데,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은 왕따를 당해 모심기를 거의 못했다는 증언 등으로 보아 당시 함안에서는 좌익 진영의 힘이 좀 더 영향력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는 좌익 단체인 남조선 노동당 함안 지부와 대립하는 우익 단체로 대한 독립 촉진 연맹, 서북 청년단 등 많은 단체가 있었는데, 이중 정부의 비호를 받은 대한 청년단의 세력이 대단했다. 1947년 한해 경상남도에서 좌·우익의 대립으로 인해 일어난 사건에는 군북대창 사건, 함안 금천 소요 사태 등 무려 112건에 달했다.
[광복 직후 함안의 토지 문제]
제방이 설치되지 않아 해마다 여름이면 강의 범람으로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경상남도 함안은 일제 강점기 일본이 제방을 설치하고 저습지를 개간해 동양 척식 회사를 운영한 후 많은 농지들이 소작농에 의해 관리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광복 후 「농지 개혁법」[1950년 3월 제정]으로 해결되어야 했지만 함안 농장 사건은 경작자인 만여 명의 소작인이 지주를 상대로 농지의 소유권을 차지하려는 분규 사건으로 1945년 연말부터 시작되어 법적 싸움으로 이어져 10년이 흐른 1955년 11월에 양측의 화해 협정이 성립됨으로써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강창환(姜昶桓)이 수차례에 걸쳐 경찰에 구속되고 우익 청년 단체의 폭행으로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함안 전투와 복구]
경상남도 함안은 6·25 전쟁사에서 매우 중요한 격전지로 1950년 8월 18일 낙동강이 최후의 방어선이 되면서 함안은 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함안 전투에 참가한 병력은 미군 약 1만 6000명, 북한군 약 5,000명, 남한군 300명 이상이 참여했다. 서북산(西北山)은 무려 19회나 뺏고 뺏기는 백병전이 반복되어 미군 병사들이 서북산을 전투산이라 부르게 되었고, ‘갓뎀산’이라고도 불렀다. 이런 치열한 전투로 인해 함안은 전쟁에 강제 동원된 주민들이 아군, 적군 가리지 않고 부역을 강요당해 민간인의 피해가 많은 지역이었다. 하지만 1953년 휴전 협정 후 이루어진 전후 복구 사업에서 농업에 기반을 둔 함안은 그 순위가 뒤로 밀렸다. 때문에 재건 속도가 늦어 주민의 비참한 생활상이 개선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함안의 새마을 운동]
1970년 4월 22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 의해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우리 마을을 우리 힘으로 새롭게 바꾸어 보자’는 운동으로 농촌에서 많은 호응을 얻었다. 대부분이 농촌이었던 경상남도 함안 지역은 당시의 초가집 없애기, 블록 담장으로 바꾸기, 마을 안길 넓히고 포장하기, 다리 놓기, 농로 넓히기, 공동 빨래터 설치 등의 기초 환경 개선 사업과 마을 회관 건립, 상수도 설치, 소하천 정비 등의 사업을 통해 마을의 모습이 점차 변화하게 되었고, 복합 영농 추진, 축산, 특용 작물 재배 등을 통해 농가 소득의 증대에 대해 새로운 모색을 하게 되었다. 이후 1980년대에는 각 마을에 새마을 지도자, 부녀회 등이 만들어져 각종 사업을 마을에 전개하는 데 앞장서게 되었다.
[함안의 문화재 현황]
경상남도 함안군에는 국가 지정 문화재 8점, 경상남도 지정 문화재 53점이 있다. 국가 지정 문화재는 함안 대산리 석조 삼존상(咸安大山里石造三尊像)[보물 제71호], 함안 방어산 마애 약사여래 삼존 입상(咸安防禦山磨崖藥師如來三尊立像)[보물 제159호], 함안 성산산성(咸安城山山城)[사적 제67호], 함안 말이산 고분군(咸安末伊山古墳群)[사적 제515호], 함안 용산리 함안층 새 발자국 화석 산지(咸安龍山里咸安層-化石産地)[천연기념물 제222호], 함안 영동리 회화나무[천연기념물 제319호], 함안 대송리 늪지 식물[천연기념물 제346호], 함안 무기연당(咸安舞沂蓮塘)[중요 민속 문화재 제208호] 등이다. 경상남도 지정 문화재는 유형 문화재 17점, 지방 기념물 10점, 무형 문화재 2점, 지방 민족 자료 및 문화재 자료 24점 등으로 나뉜다.
[함안의 다문화 가족]
오늘날 경상남도 함안에는 여러 이유로 하는 국제결혼과 이주 노동자로 인한 많은 다문화 가정이 생기고 있다. 이들을 위해 경상남도 함안에서는 2009년 4월 8일 다문화 가족 지원 센터를 건립하여 운영 중인데, 2013년 다문화 가족 지원 센터에 등록된 인원은 총 183명으로 나라별로는 베트남이 103명으로 가장 많고, 중국 24명, 필리핀 18명, 캄보디아 17명 순으로 나타났다. 거주 지역별로 보면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에 59명, 칠원읍 32명, 군북면 25명, 칠서면 17명 순이다. 아직은 그 지원이 미비한 수준이지만 이들의 문제는 단순한 적응의 문제가 아니라 차별과 빈곤이라는 기본적인 문제가 포함되어 있어 다른 사회 문제들과 연결되어 해결하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