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10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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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美術 |
영어공식명칭 | The Fine Arts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경윤 |
[정의]
전라남도 해남 지역에서 공간 및 시각의 미를 표현하여 이루어지는 미적 표현.
[개설]
조선 후기 서화가인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로부터 시작된 해남의 미술은 일제강점기 서양화의 유입으로 전통 양식과 외래 양식의 갈등을 겪으면서 서양의 근대적 양식을 수용하였다. 1970년대 이후 지역의 화단이 활성화되었으며 1990년 이후에는 해남미술협회[한국미술협회 해남지부]를 중심으로 다양한 장르의 미술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조선시대 해남의 미술]
해남은 예부터 ‘미향(美鄕)’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회화의 전통을 간직한 고장이다. 조선시대 해남의 미술은 사대부를 중심으로 유교적 시(詩)·서(書)·화(畵)의 전통을 이어 왔다. 가장 대표적인 화가가 공재 윤두서이다.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삼재(三齎)’로 불리는 윤두서는 예리한 관찰력과 정확한 묘사력을 구사한 인물화와 말 그림을 잘 그렸다. 대표작은 해남윤씨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윤두서자화상」[국보 제240호]으로 동양의 초상화가 추구한 전신사조(傳神寫照)[초상화나 인물화를 그릴 때 인물의 인격과 정신까지 표출해야 한다는 초상화론] 기품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 밖에 「나물 캐는 여인」, 「밭 가는 농부」, 「짚신 삼는 사람」 등은 모두 하층민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서민 풍속화로 평가할 수 있으며 조선 회화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한편 윤두서는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남종화를 과감하게 수용하였는데 활달하고 원숙한 필력이 돋보이는 「노승도」는 남종화풍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윤두서의 남종화풍은 아들 윤덕희(尹德熙)[1685~1776]를 거쳐 손자 윤용(尹愹)[1708~1740]까지 3대를 이어 간다. 윤덕희는 정릉 현감을 지내는 등 벼슬살이를 하면서 아버지의 화업(畵業)을 이어 남종화를 즐겨 그렸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월야송하관폭도」, 「도담절경도」, 「미인기마도」, 「산수도첩」, 「송하인물도」 등이 전한다. 윤용은 산수화에서는 아버지 윤덕희의 남종화풍을, 풍속화에서는 할아버지 윤두서의 서민적 화풍을 이었다. 그러나 33세의 나이로 요절해 독자적인 화풍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채애도」, 「홍각춘망도」, 「수하필서도」, 「연강우색도」 등이 있다. 특히 꽃과 나비, 잠자리 등을 그린 「초충도」는 수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윤두서는 우리 회화 사상 조선 중기와 후기를 잇는 중요한 화가로 그의 실학사상에 바탕을 둔 화풍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의 풍속화로 이어졌고, 남종화의 기법은 소치(小癡) 허련(許鍊)[1809~1892] 일가로 전승되었다. 하지만 정작 해남에는 공재 3대 이후로 그 맥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하였다. 그로부터 한 세기쯤 지난 뒤 미방(米舫) 김익로(金益魯)[1845~1915]가 화맥을 가까스로 이어받았다. 초의(草衣)[1786~1866]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에게 사사한 김익로는 시·서·화를 갖춘 삼절로 널리 알려졌으며, 특히 대표작 「괴석도」는 선비 정신과 함께 조형성을 잘 보여 주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김익로는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라 하여 그림과 시가 한데 어우러지는 독자적인 화격(畫格)을 형성하였으며, 아들 소방 김흥주와 남원 김환주도 김익로의 화풍을 이어받아 서화가로서 일가를 이루었다.
[근현대 해남의 미술]
해방 전후에 해남 미술의 맥을 이은 화가는 설산(雪山) 최광익(崔光益)[1891~1970]이다. 최광익은 해방 후 한국 최고의 인물화가로 특히 고승의 진영(眞影)을 잘 그렸다. 최광익의 대표작으로는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라 일컫는 경허(鏡虛)[1849~1912]의 진영이 있다. 1936년 만공(滿空)[1871~1946]의 의뢰로 그렸으며, 충청남도 덕숭산 정혜사 금선대의 진영각에 보존되어 있다. 해남읍 서림공원 내 단군전의 단군 어영(御影)도 최광익의 작품이다. 한편 해남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진 이는 천응복이다. 일본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천응복은 수채화에 뛰어났다. 그 외에도 1920년대 동경미술학교를 다녔던 해남 출신 화가로는 김두제와 박남수 등이 있다.
해남에서 최초로 전문적인 근대미술 교육을 받은 화가로는 소계(小溪) 임기수(林奇洙)가 있다. 해남에서 태어난 임기수는 동경미술학교에서 공부한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대흥사에 40여 년간 파묻혀 지내며 고독하게 자신만의 유유자적한 화풍을 다듬었다. 임기수의 장남 임준식(林俊植) 또한 한국화가로 부친의 업을 이었다. 해방 전후에 해남에서 활동한 여성화가로 숙당(淑堂) 배정례(裵貞禮)가 있다. 충청북도 영동군 출신인 배정례는 아버지에게 사사한 뒤 동경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근대 수묵 채색화의 대표 화가인 이당(以堂) 김은호(金股鎬)[1892~1979]에게 사사하였다. 배정례는 미인도를 잘 그렸으며 천경자, 박래향, 이현옥 화가와 함께 한국 4대 여류화가로 꼽혔다.
한편 전라남도 장성군 출신의 현당(玄堂) 김한영(金漢永)[1913~1988]은 김은호에게 사사한 뒤 조선미술대전 제17회[1938년]와 제18회[1939년]에 입선한 한국화가로 해남에 오래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대흥사 유선관에 머무르며 임영송, 정동복 등 제자 양성에도 힘을 썼다.
1970년대 이전에 배출된 해남의 한국화 화가로는 정서진, 이영미, 이인배, 천봉균, 임기수, 성인호, 추순자, 이규원 등이 있고, 서양화 화가로는 윤주훈, 조희영, 윤미란, 문국만, 윤재묵, 임정숙, 김연덕, 김현옥, 이상순, 황양자, 서정순, 진원장, 박동인, 박남, 김순자 등을 들 수 있다.
1970년대 이후 해남 출신으로 뛰어난 미술 역량을 갖춘 일군의 작가들이 고향에 머무르며 활발한 창작 활동을 벌였다. 황석훈, 김철수, 정동복 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활동한 1970년대 후반부터 해남의 미술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학산(鶴山) 황석훈(黃石勛)은 해남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1979년 미술동호회 ‘해화회’를 만드는 등 해남 미술인의 단합을 위해 활동하였다. 농전(農田) 김철수(金喆洙)는 1970년대 후반에 고향으로 내려와 ‘농전화실’을 열고 창작 활동을 하면서 1989년에 설립된 ‘해남미술협회’ 초대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또 김한영에게 사사한 남곡(南谷) 정동복(鄭東福)은 해남읍에서 ‘남곡화실’을 운영하며 지역 내 미술 활동에 앞장서다가 1999년 한국미술협회 해남지부 인준에 힘쓰고 초대, 2대 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해남의 대표작인 서예가로는 백련(白蓮) 윤재혁(尹宰赫)을 들 수 있다. 윤재혁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11대손이며 윤두서의 8대손으로 선현의 문예 정신을 이어받아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 부문 특선 3회, 전라남도 미술대전 대상 및 대한민국 남농미술대전 대상 등을 수상하였다. 한편 1980년대에 들어와 해남고 미술동문회가 결성되면서 서양화 영역에서도 괄목할 활동이 이뤄졌다. 1987년부터 ‘풋나락전’이라는 이름으로 매년 해남읍에서 열리는 해남고 미술 동문 전시회는 해남 출신의 젊고 역량 있는 작가들과 주민들이 작품으로 소통하는 정례 행사로 자리를 잡았다.
1970년대 이후 해남이 배출한 조소(彫塑) 작가로는 김설희, 윤양희, 박진환 등이 있으며 공예에서는 김종호[호남대 교수], 도예 분야에서는 김태전이 있다.
한편 해남에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해남지부[해남 민예총]가 결성되고, 산하에 한국미술협회 해남지부가 조직되면서 미술 대중화의 새로운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한국미술협회 해남지부는 매년 정기 전시회를 개최하는 한편 2008년부터 매년 열리는 ‘공재문화제’ 등의 행사에 참여하면서 주민과 함께하는 미술 세계를 펼쳐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