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6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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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光啓 |
영어공식명칭 | Yun Gwanggye |
이칭/별칭 | 경열(景說),귤옥(橘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윤섭 |
[정의]
조선 후기 해남 출신의 문신.
[개설]
윤광계(尹光啓)[1559~?]는 많은 시문을 남겨 해남윤씨(海南尹氏) 집안 문인학풍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해남의 귤정(橘亭) 윤구(尹衢), 귤주(橘洲) 민여안(閔與顔)과 함께 3귤로도 불리고 있다.
[가계]
윤광계의 자는 경열(景說), 호는 귤옥(橘屋)이며, 본관은 해남(海南)이다. 해남윤씨 득관조인 윤효정(尹孝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목사(牧使) 윤행(尹行)이다. 아버지는 윤화중(尹和中)이며, 어머니는 이희양(李希陽)의 딸이다.
[활동 사항]
윤광계는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문인으로 1589년(선조 22) 생원이 되었고, 158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1년 주서, 세자시강원설서를 지냈다. 1603년 호조정랑으로서 지제교 겸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역대 실록의 재간행에 참여하였다. 이듬해에는 예조정랑을 거쳐 1606년 평안도도사가 되었고, 1607년 공조좌랑이 되었다. 광해군 즉위 후에는 말단의 관직을 전전하다가 은퇴하여 고향 해남에 내려와 귤나무를 심고 유유자적하며 살았다.
윤광계의 시는 시격이 정련(精鍊)되었고 율조(律調)가 청아한 것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윤광계의 저서로는 시문집인 『귤옥집(橘屋集)』이 있다. 시문집 권두의 서와 권미의 발에 따르면 1676년(숙종 2) 윤광계의 증손인 윤승후(尹承厚)·윤천후(尹天厚) 형제가 김수항(金壽恒)에게 부탁하여 유고(遺稿)를 추려 편집했던 것을 1829년(순조 29) 후손 윤정은(尹正殷)이 간행한 것이라고 나온다. 내용은 제1책에 김수항의 서, 송시열의 「귤옥고발(橘屋稿跋)」이 있고, 상권에는 오언절구 40수, 칠언절구 144수, 오언율시 53수, 칠언율시 149수가 있다. 제2책의 중권에는 오언배율 23수, 칠언배율 3수, 오언고시 41수, 칠언고시 8수에 이어, 「귤옥집속(橘屋集續)」으로 시 100수가 있다. 윤광계는 율시와 배율에서 좋은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역여설(逆旅說)」, 「이수설(移樹說)」 및 「사남귀사(思南歸辭)」, 「서암부(西庵賦)」 등은 품격이 높고 능숙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