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6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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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衢 |
영어공식명칭 | Yun Gu |
이칭/별칭 | 형중(亨仲),귤정(橘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윤섭 |
출생 시기/일시 | 1495년 - 윤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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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13년 - 윤구 진사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516년 - 윤구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16년 - 윤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17년 - 윤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38년 - 윤구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41년 - 윤구 순창군수 역임 |
거주|이주지 | 해남현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해리 |
부임|활동지 | 순창 - 전라북도 순창군 |
유배|이배지 | 영암 - 전라남도 영암군 |
묘소|단소 | 전라남도 해남군 북일면 금당리 - 전라남도 해남군 북일면 금당리 |
사당|배향지 | 해촌서원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해리2길 50[해리 90-2]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해남(海南) |
대표 관직 | 홍문관수찬|성균관사성 |
[정의]
조선 전기 해남 출신의 문신.
[개설]
윤구(尹衢)[1495~?]는 해남윤씨(海南尹氏) 문중에서 가장 먼저 중앙 관계에 진출한 인물이다. 문장이 뛰어나 광양 최산두(崔山斗)[1483~1536], 해남의 유성춘(柳成春)[?~?]과 더불어 호남삼걸로 불렸다. 또한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을묘명현(乙卯名賢) 중 한 사람이다.
[가계]
윤구의 본관은 해남(海南)이며 자는 형중(亨仲), 호는 귤정(橘亭)이다. 할아버지는 윤경(尹耕)이며, 아버지는 해남윤씨 파시조(派始祖)인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이다. 어머니는 정귀영(鄭貴瑛)의 딸 해남정씨(海南鄭氏)이다. 1519년(중종 5) 평택임씨(平澤林氏)와 혼인하여 세 아들을 두었다. 동생인 윤항(尹衖)·윤행(尹行)·윤복(尹復)·윤종(尹從)·윤후(尹後) 중 윤행과 윤복도 과거에 급제하였다.
[활동 사항]
윤구는 1495년(연산군 1) 해남에서 태어났다. 1513년(중종 8)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16년(중종 11) 식년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제수되었다. 1517년(중종 12)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에 임명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영암으로 유배되었다. 1538년 서용(敍用)[죄를 지어 면관(免官)되었던 사람을 다시 벼슬자리에 등용함]되어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에 제수되었다. 1541년에는 순창군수로 부임하여 재임 시 관아에 지체된 송사가 없고 덕정(德政)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1545년(명종 즉위년) 홍문과 부교리로 제수되었으나, 그 다음날 사헌부가 전날의 실수를 들어 벼슬을 물릴 것을 요청하자 명종이 허락하였다. 이후 1549년 정월에 어머니상을 당하여 장례를 치르고 난 뒤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윤구는 짧은 생애 동안 많은 학자들과 교분을 쌓았다. 이황(李滉), 유희춘(柳希春)과 같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를 하였고, 조광조(趙光祖)·최산두(崔山斗), 박상(朴祥)·김인후(金麟厚)·임억령(林億齡)·양팽손(梁彭孫)·윤개(尹漑)·권운(權雲) 등 당대의 이름난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윤구의 문인으로는 풍암(楓蓭) 문위세(文緯世)와 사매당(四梅堂) 이응중(李應鍾)이 있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학문과 저술]
윤구는 『귤정유고(橘亭遺稿)』에 33편의 글을 남겼다. 『귤정유고』는 시(詩), 부(賦), 논(論) 등으로 이루어졌다. 윤구가 지은 「의제발상론(義帝發喪論)」은 중국에 전해져 학자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그 글이 중국의 『향시록(鄕試錄)』에도 실렸다. 『귤정유고』의 편찬 시기는 알 수 없으며, 현재 필사본 3종, 목활자본 1권, 국역 양장본이 현존한다. 필사본은 윤종(尹悰)[1705~1757]의 장서인이 날인되어 있으므로 필사 시기를 1757년 이전으로 추측할 수 있다. 목활자본은 윤구의 13세손인 윤관하(尹觀夏)[1841~1926]가 윤구 형제들의 문집을 합철한 목활자본 『연방집(聯芳集)』 1권에 수록되어 있다. 2005년에는 『귤정선생유고(橘亭先生遺稿)』라는 제목으로 국역이 되었다.
[묘소]
윤구의 묘소는 해남군 북일면 금당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윤구는 1538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후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최부(崔溥)·임억령(林億齡)·유희춘(柳希春)·윤선도(尹善道)·박백응(朴伯凝)과 함께 해촌서원(海村書院)에 배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