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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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人民委員會海南支部 |
영어공식명칭 | Haenam Council of People's Commissars |
이칭/별칭 | 해남인민위원회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문종안 |
[정의]
1945년 10월 경 전라남도 해남 지역에서 결성된 민간 자치 기구.
[설립 목적]
1945년 9월 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열고 국내외 좌우익 정치세력을 망라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설립을 선포하였다. 인민공화국 선포 이후 각 지방에서 지방인민위원회 조직이 진행되었으며, 이 흐름 속에서 인민위원회 해남지부도 결성되었다.
[변천]
1945년 10월 중순 인민위원회 해남지부가 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인민위원회 해남지부의 구성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던 인물은 김정수(金正洙), 김창수(金昌洙), 오장록(吳長錄) 등 젊고 진보적인 사회주의 사상가 그룹이었다. 인민위원회 해남지부 당시 위원장은 김정수, 부위원장은 천진문이었으며, 이성학, 김주식을 제외한 대부분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인민위원회 해남지부는 군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김정수가 주민자치 군수로, 주동혁(朱東赫)이 경찰서장으로 선출되었다. 주동혁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자 천진문이 서장을 이어받았다.
1945년 11월 23일 미군 40사단 45중대가 해남에 주둔하였다. 1945년 12월 초 미군 40사단 45중대장 바틀렛(Frank E. Bartlett) 중령은 인민위원장 김정수를 해남군수로, 천진문을 경찰서장으로 임명하는 등 인민위원회 해남지부를 인정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인민위원회 해남지부와 미군의 우호적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1945년 12월 말 미군은 김정수를 ‘정권 찬탈’, ‘불법테러’ 등의 이유로 체포하고 인민위원회 해남지부 지도자 19명을 구속하였다. 그리고 해남 경찰서장 천진문 휘하의 경찰 38명을 축출하고 경찰서를 장악하였다. 미군의 인민위원회 해남지부 탄압에 항의하는 해남 군민들의 시위가 몇 차례 지속되었으나, 미군정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진압되었다. 결국 1946년 3월 동력을 잃은 인민위원회 해남지부는 해체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인민위원회 해남지부는 군의 지방 사업인 버스 운수업, 김 양식업 등을 운영하며 재정을 확보하였고, 치안대를 조직하여 적산가옥을 관리하면서 사사로이 점유하거나 팔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군민들의 계몽에도 주력하였다. 인민위원회 해남지부의 산하단체 중 오장록이 추축이 되고 윤인석(尹仁錫), 임건호(林建鎬) 등이 참여한 해남농민위원회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해남농민위원회는 주로 소작료 불납 운동과 토지 무상분배 운동을 일으켰다. 미군정 산하 신한공사가 적산 농지 수확량 중 3할의 소작료를 받아들이도록 하자 불납 운동을 벌였으며, 농민들의 호응이 상당하였다. 불납 운동 후에 1946년 해남추수봉기가 이어진다.
[의의와 평가]
인민위원회 해남지부는 건국준비위원회 해남지부와 마찬가지로 해방 후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군민들에 의해 김정수가 직선 군수로 추대되었고, 잠시나마 미군정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해남농민위원회는 일제강점기부터 수탈당하던 농민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