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375
한자 梨津鎭
영어공식명칭 Ijinji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변남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폐지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 이진진 폐진
개정 시기/일시 1627년 - 이진진 만호진으로 승격
관할 지역 이진성지 -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 지도보기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에 설치되었던 조선시대 수군진.

[개설]

조선시대에는 제주를 왕래하는 관리들이 배를 타고 내리는 포구였다. 전라우수영에 속한 수군진으로 달량진왜변 직후에 종9품 권관진이었다가 1627년(인조 5) 만호진으로 승격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두 차례 머문 곳으로 동학농민전쟁 이후 1895년에 폐진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이진리는 지형이 배 모양의 형국이어서 배진 또는 이진이라 하였다. 이진리는 지금은 해남군 북평면 지역이나 조선시대에 이진은 영암군의 북평종면에 속한 포구로 제주를 왕래하는 관리들이 배를 타고 내리는 곳이다. 즉, 제주 가는 배[船]를 타는 배진이나 한자로 표기를 ‘이진(梨津)’으로 하였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등장하는 이진은 내용상으로 남창리달량을 지칭하는 경우가 혼재한다. 이는 이진 위치가 달량과 인접하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이진리남창리 달량에서 남쪽으로 800여m 떨어진 곳이다. 따라서 이진진의 설치는 달량진의 폐진과 관련이 깊다.

[관련 기록]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이진진에는 종 4품 무관인 수군만호가 배치되었으며, 군관 18명 관리 18명, 지인(知印) 5명, 사령(使令) 37명이 배속되었다. 또 『해남읍지』[1872]에는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에 대변군관 12명, 진리(鎭吏) 18명, 사령 6명, 군뢰(軍牢) 2명, 방군(防軍) 271명이 배치되었다. 이진진은 1895년에 폐진되었다.

[내용]

이진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두 차례 머문 적이 있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의하면 첫 번째는 1596년 윤년 8월 25일[양력 10월 16일] 점심 무렵이다. “일찍 떠나 이진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에 곧 해남으로 갔다. 도중에 김경록(金景祿)이 술을 차고 와서 봤다. 어느 결에 날이 저물어 횃불을 밝히고 가니, 밤 열 시께에야 해남현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두 번째는 1957년 8월 19일 장흥 회령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에게 12척의 배를 인계 받은 다음날 8월 20일 이진에 도착하였으나 착란증세로 인하여 인사불성에 이르러 4일간 배에서 내려 몸을 추스르다가 어란진으로 떠난 적이 있다.

이진리에는 수군진성과 우물 그리고 수군만호비 4기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이진진은 “영암군의 남쪽 120리에 있는데 성은 돌로 쌓았다. 성 주위는 1,470척에 높이는 8척 치첩(雉堞) 334척이며 성내에 샘이 2개가 있다.”라고 기록되었다. 이진성은 구릉지를 이용하여 남북으로 축성되었다. 성축의 일부가 훼손되었으나 보기 드물게 원형이 잘 유지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총 940m 정도로 동벽이 350m, 서벽이 280m, 남벽이 116m이다. 특히 서벽과 서문지의 옹성이 잘 보존되었다. 서문지 옹성은 둘레 34m, 높이 5m, 폭 2.2m이며 옹성 안에 우물이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수군만호비 4개는 원래 농협 창고 옆에 있었으나 현재는 이진초등학교 입구로 이건되었다. 관련된 수군만호와 비에 기록된 건립 시기는 다음과 같다. 1848년에 박경환(朴慶煥), 1851년에 최상규(崔祥奎), 1861년에 김관길(金寬吉) 2기가 건립되었다. 객사[마을 회관] 등 관아터가 전언하며 마을의 곳곳에서 백자편이 출토된다. 특별하게도 이진마을 담과 꽃밭에는 제주도의 현무암이 매우 많이 발견된다. 이는 제주도에서 돛단배를 타고 나올 때 배의 무게 중심을 유지하기 위하여 현무암을 싣고 나와서 이진에서 제주로 돌아갈 때는 곡식을 싣고 현무암은 바닷가에 버렸기 때문이다.

[변천]

이진리는 조선시대에 영암군 북평종면 지역에 속하였으며, 전라우수영에 속한 수군진으로 처음에는 종9품 권관진이었다가 정4품 만호진으로 승격되었다. 정유재란 후인 1598년(선조 31)에 처음 설진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명종실록(明宗實錄)』의 1556년(명종 11) 7월 20일 기록에 이진(梨津)의 권관(權管) 신종우가 보길도와 작지도에 상륙한 왜구를 잡았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이로 보아 달량진왜변 직후에 이진진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근에 있는 달량진성이 왜구에 3번이나 함락당하였는데 그 이유는 성(城)이 주변의 산보다 낮아 적에게 노출되어 관방으로 부적합하였기 때문이다. 이진진은 1627년(인조 5) 만호진으로 승격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진은 조선시대 제주도 입출항 시 이용했던 주요 포구로 조선시대 해양 방어 체제와 이순신 장군의 정유재란 당시 행적을 보여 주는 유적이다. 현재 이진리에는 이진성과 성내 마을 공간은 보기 드물게 원형이 잘 보존되어 그 가치가 높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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