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367
한자 朝鮮時代
영어공식명칭 Joseon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조선
집필자 한정훈

[정의]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 왕조 시기의 해남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조선시대 해남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의 양상을 살펴보기 위해 행정 편제, 교통·통신, 지방 군제와 임진왜란 그리고 유교문화·교육기관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아울러 해남의 목마장 운영에 관해서도 간략히 언급하였다.

[행정 편제]

해남현(海南縣)은 1409년(태종 9)에 진도군과 합쳐 해진현(海珍縣)이 되었고, 1412년(태종 12)에는 현산면 고현에 있던 치소를 영암 땅 옥산으로 옮기는데, 지금의 삼산면 계동이다. 이러한 치소의 이동은 여말선초 왜구의 침략에 따른 공도 조치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군현의 일방적인 병합과 진도 읍치를 먼 곳으로 옮긴 것이 군현 사정과 주민들의 불편함을 야기하여 1437년(세종 19)에 이르러 다시 이전처럼 해남현과 진도군으로 갈라놓았다. 해남현이 독립된 뒤에 주변의 황원현·죽산현과 신갈부곡·팔마부곡 등의 지방 행정단위가 이속(移屬)되었다. 이렇게 해남현 영역이 넓어지자 원활한 지방 행정을 위해 치소를 다시 현재의 해남읍으로 이전하였다. 이때 해남현은 현재의 해남 영역과 거의 비슷한 범위를 갖게 되었고, 조선 말까지 큰 변화 없이 존속하였다. 다만 송지면 일대와 북평·북일·옥천 일대는 영암의 월경지로, 삼산면 서부 지역은 진도의 월경지로 남게 되었다.

[전라우수영의 설치]

해남군 문내면에 우수영이라는 이름이 있게 된 것은 조선시대 때 전라우수영[전라우도수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1440년(세종 22)에 무안 대굴포에 있던 수군처치사영이 황원곶(黃原串)으로 옮겨 왔다. 그 후 1464년(세조 10)에 절도사영으로 승격되어 수군처치사가 수군절도사로, 진무(鎭撫)[또는 녹사]가 우후(虞候)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1479년(성종 10)에 순천에 전라좌수영이 생기면서 전라우수영이 되었다.

해남 우수영에는 전라우수사와 전라우후가 있고, 그 밑의 거진은 임치도진관으로 임치도첨사가 관장하였으며, 제진으로는 8포, 즉 검모포[부안], 법성포[영광], 다경포[영광], 목포[무안], 어란포[해남], 근사포[옥구], 남도포[진도], 금갑도[진도]가 있었다. 이후 1522년(중종 17) 왜구의 추자도 침입을 계기로 완도에 가리포진관(加里浦鎭管)이 설치되었다. 임치도진관을 나누어 가리포진관을 설치하면서 임치도진관에 지포를 신설하여 7포를, 가리포진관에 어란·금갑도·마도·신지도를 합하여 4포를 두고 제주진관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였다.

하지만 진관(鎭管) 체제가 무너지면서 육군과 수군의 지휘권도 합하여지는 추세였다. 임진왜란 당시의 모습을 보면 해안 지방 수사의 관할권이 직속 첨사와 만호뿐만이 아니라 육지의 수령인 도호부사, 군수, 현감 등에게도 미치고 있었다. 따라서 전라우수영 아래 육지의 행정구역인 7관[해남·진도·영암·나주·무안·함평·영광]도 수군의 작전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평시에는 7관과 임치도진관 및 7포, 가리포진관 및 4포가 각기 운영되다가 일단 유사시에는 부사, 군수, 현감, 첨사, 만호 등이 자기 관할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전라우수영에 집결하였던 것이다.

[임진왜란과 해남]

조선 1555년(명종 10) 임진왜란의 전초전 성격을 지닌 을묘왜변 때에 60여 척의 왜구가 해남 달량진(達梁鎭)을 침략하였다. 달량진은 현재의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에 있었던 수군진으로 해남과 완도를 연결하고 있으며 해로상의 중요한 요충지로서 강진·영암 지역으로 상륙하여 들어갈 수 있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달량진을 침입한 왜구들은 어란포진·마도진·가리포진 등의 진과 장흥·강진 등을 순식간에 함락시켰다. 그러나 해남은 현감 변협이 성을 굳게 지키고 있었으며 나중에 도순찰사 이준경, 전주부윤 이윤경이 군사 3,000명을 이끌고 오고 영암우방어사 김경석이 가세하자 전세는 역전되어 왜적은 결국 퇴각하였다.

또한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이순신은 옥포·합포·당항포·울포·노량·한산도 등에서 일본의 수군을 크게 무찔렀는데, 이때에 낙안군수 신호·흥양현감 배홍립·광양현감 어영담·보성군수 김득광·녹도만호 정운·방답진첨사 이순신·사도첨사 김완·여도권관 김인영 등 전라남도 지방 각처의 수령과 만호가 함께 출정하였다.

특히 잘 알려진 명량대첩은 13척의 배로 10배 이상의 적을 크게 이겨, 일본수군이 수륙병진 전략을 통해 서해로 진출하려는 계획을 무산시킨 세계 해전사에 남을 대승첩이었다. 1597년 9월 16일에 거둔 이러한 기적적인 승리는 해남 지역을 비롯한 연해 주민들이 모두 참여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왜군에게 아군의 숫자가 많은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울돌목 비닷가 근처의 높은 곳에 올라 강강술래를 벌였다는 유래에서 그러한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교통·통신-역원과 봉수]

전라도 해남현에는 세 역이 분포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녹산역(祿山驛)은 현의 남쪽 5리[약 1.96㎞]에, 남리역(南利驛)은 현의 서쪽 35리[약 13.75㎞]에, 별진역(別珍驛)은 현의 북쪽 30리[약 11.78㎞]에 있다고 하였다. 녹산역해남읍 신안리에, 남리역은 황산면 소재지인 남리마을에, 별진역은 지금의 계곡면 성진리에 자리하였다. 녹산역, 남리역, 별진역은 고려시대 승주[전남 순천]와 나주를 잇는 역도인 승나주도(昇羅州道)에, 조선시대에는 전라우도의 벽사도(碧沙道)에 속하였다. 해남현에는 세 개의 원(院) 시설이 확인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만희원(萬喜院)은 현의 서쪽 12리[약 4.71㎞]에, 적량원(赤良院)은 현의 서쪽 23리[약 9.03㎞]에, 삼기원(三歧院)은 현의 서쪽 60리[약 23.56㎞]에 있다고 되어 있다. 세 원의 위치가 모두 현의 서쪽에 있는 특징이 있다. 삼기원은 진도 벽파진의 해남 쪽 나루터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은 진도대교가 놓이기 전에 해남과 진도를 연결하는 해상교통로였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해남현의 봉수 기록에 따르면, “황원(黃原) 봉수[문내면 고당리 일성산]는 현의 서쪽 60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진도군 점찰산(占察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무안현의 유달산(鍮達山)에 응한다. 금강산 봉수[해남읍 금강산 정상]는 남쪽으로 관두산 봉수[화산면 관동리 관두산]에 응하고, 북쪽은 관문에만 보고한다. 관두산 봉수는 서쪽으로 진도군의 점찰산에 응하고, 남쪽으로 영암군의 갈두산(葛頭山) 봉수[송지면 송호리 갈두마을 사자봉 정상부]에 응한다.”라고 하였다.

[해남의 목장]

해남현의 목장은 황원에 있었다. 『여지도서』에 “황원 목장에 감목관으로 감관 1명, 목리 26명, 지인 13명, 사령 20명, 목자 19명, 방자 10명”이라고 목장 관리 인원을 적어 놓고 있다. 목장의 규모와 말의 수는 진도군 지력산 목장편에 나온다고 부기되어 있는데, 지력산 목장을 보면 기르는 말은 818마리이고 분양마는 서울 사복시에서 나누어 준 대로 길러 3월에 중앙에 바친다고 되어 있다.

[해남의 해창]

『여지도서(輿地圖書)』[1757]에 처음 등장하는 해남의 해창(海倉)은 화산면 해창마을에 있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전세[토지세 378석]나 대동미[2464석] 등을 2월에 거둬들여 3월에 배에 싣고 안흥량~통진~강화를 거쳐 한양까지 운반하였는데, 그 일정은 17일간이었다 한다. 해창마을은 백수십 호가 되는 큰 마을이었다. 해창에는 세곡 수납과 조운선단을 지키기 위한 관리와 병졸이 파견되고, 인부와 세곡 상인들이 붐비어 한시적으로 장시가 형성되었다. 또한 고깃배는 물론이요 교통의 요충지로서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었다.

[향교]

해남향교의 정확한 설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482년(성종 13)에 처음 있던 곳에서 현재의 해남읍 구교리[지금의 해남여자중학교 뒤편]로 옮겼다. 그리고 60년 뒤인 1549년(명종 4)에 현감과 해남 양반들이 주관하여 향교 위치에서 대성전을 열 걸음 높은 곳으로 옮겨 중수하였으며 1550년 명륜당도 중수하여 전체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1673년(현종 14)에 해남의 유림들은 성종 13년 당시의 옛터로 옮기기를 원하여 결국 대성전을 예전처럼 한 단 낮은 곳으로 옮겨 세웠다.

조선 후기에 작성되는 해남현의 지도에 의하면 향교의 위치는 읍성의 동쪽으로 나와 있다. 1740년에 만들어졌다고 짐작되는 『해동지도』 해남현 지도, 1765년(영조 41)에 만들어진 『여지도서』, 1872년에 작성된 『전라도지도』에 의하면 모두 향교의 위치를 읍성의 동쪽으로 표시하고 있다. 따라서 해남향교는 1739년(영조 15) 이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원·사우]

조선시대에 해남에는 모두 17개의 서원·사우가 건립되어 있었다. 『조두록』이나 『증보문헌비고』, 『전고대방』 등에 기재되어 있는 서원 이외에도 읍지나 지표조사 등에서 찾아지고 있다. 연대로 보면 18세기 후반부터 세워진 서원들이 읍지나 지표조사 등에서 보여, 대개는 예조에 보고하지 않고 사사로이 세운 서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제향 인물을 보아도 18세기 후반부터는 전란의 창의자, 유공자이고 절의, 효행 등도 확인된다. 그리고 같은 성씨의 선조, 후손들이 함께 모셔져 있어, 이들은 대부분 향현사(鄕賢祠) 정도의 문중서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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