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4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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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卓泳來 |
영어음역 | Tak Yeongrae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횡천면 횡천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양판석 |
출생 시기/일시 | 192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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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42년 |
활동 시기/일시 | 1944년 12월 2일 |
활동 시기/일시 | 1977년 12월 |
활동 시기/일시 | 1990년 |
출생지 | 경상남도 통영시 태형동 284 |
활동지 | 경상남도 하동군 횡천면 횡천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하동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탁영래(卓泳來)[1922~ ]는 경상남도 통영시 태형동 284번지에서 태어났다. 일본 와세다대학 재학 중 무력항쟁을 기획하다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부인은 신상임(辛祥任)이며,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탁영래는 1940년 3월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유학하던 중 학생 김인준(金寅準)과 구국 운동에 뜻을 다지고 동지들을 모았다. 7월경 귀국하여 진주재판소에 근무하는 후배 조정수(趙貞洙)를 만나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2월 도쿄에서 김인준과 회동한 뒤 다시 귀국하여 조정수·박바우에게 동의를 받았다.
1941년 동지들과 만주 접경지대에 주둔 중인 일본 헌병대를 방화하기로 하고, 12월 하순경 서울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상경하여 권순조를 만나 경과를 설명하고 협조를 당부한 뒤, 진주로 가 조정수·박바우에게도 함경도에서의 상황을 전하였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김인준에게 비상 대책을 마련해야 하며, 서울에서의 만남을 예정대로 진행하자는 당부의 서신을 보냈다.
탁영래는 1942년 함경북도에 있는 동지들에게 7월 하순경 서울에서의 회동 소식을 전하러 가던 중, 7월 16일 삼랑진 차 안에서 검거되어 경상남도 경찰국 고등과로 이송되었다. 일본을 증오하는 내용의 일기가 압수되어 매우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부산 지방검찰국에 송치되어 다시 2개월간 문초를 받았다. 1942년 12월 1일 2년형을 선고받고 부산형무소 독방에 수감되었다. 8개월 만에 일반 감방으로 옮겨져 복역하다가, 1944년 12월 2일 출옥하였다. 출옥후탁영래는 하동군 횡천면 횡천리를 제2의 본적지로 삼고 거주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12월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이 수여되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