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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432
한자 文孔學
영어음역 Mun gonghak
이칭/별칭 은파(隱坡)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1212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양판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7년 9월 27일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1일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3일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946년 8월 27일연표보기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추모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1212 지도보기
기념물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1533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하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강성(江城). 호는 은파(隱坡). 할아버지는 문영국(文永國)이고, 아버지는 문욱동(文勗東)이며, 어머니는 강청등(姜淸登)이다. 부인은 벽진 이씨(碧珍李氏)이며, 자녀로 5남 1녀가 있다.

[활동 사항]

문공학(文孔學)은 1897년 9월 27일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1212번지에서 문욱동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학의 기본서를 공부했으며, 14세에 한일 합방이 되자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하려 했으나 가족의 만류로 중단하고 새로운 항일 투쟁 방법을 모색하였다. 20세 즈음인 1916년에 하동군 내의 청년들과 교우 관계를 가지면서 조국 광복 운동에 동참할 뜻을 확산시켰고, 22세 즈음인 1918년에는 사천 곤양보통학교 교사 조우제와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생 최원형 등과 교제하며 국내외 정세와 항일 애국지사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 투쟁의 결의를 다졌다.

문공학은 1919년 3월 21일의 하동군 횡천면 여의리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당시 문공학이재기(李載基)와 협력하여 문증학·이영기 등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고 각 마을에 연락하여, 같은 해 4월 3일 북천면 직전리에서 두 번째 만세 시위를 거행하고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에서 잡혀서 하동경찰서로 연행되었다가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으로 이송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5월에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이 언도되어 대구감옥에서 복역하고, 같은 해 11월 29일 출옥하였다.

6개월 만에 출옥하여 북천면으로 돌아온 문공학은 이후 1년여를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였다. 그러나 1922년부터 1925년 사이에 횡천주재소와 곤양수비대 등을 습격하는 투쟁을 계속했다.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발생하고 전국에서 학생 시위가 전개되자 청년들에게 항일 사상을 고취시키고 투쟁을 전개하도록 활동하다 끌려가 고문을 당하였다. 그 이후로 항일 투쟁을 계속하다가 광복을 맞고 1년 만인 1946년 8월에 운명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주민들이 뜻을 모아 문공학 공적비(文孔學功績碑)를 마을 입구에 세웠다. 비석에는 ‘은파 문공 삼일독립운동 사적비(隱坡文公三一獨立運動事蹟碑)’라고 새겨져 있다. 1992년 정부에서 문공학의 공훈을 기리어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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