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198 |
---|---|
한자 | 密陽朴氏 |
영어의미역 | Miryang Bak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용국 |
입향지 | 경상남도 하동군 횡천면 애치리 애치동 |
---|---|
입향지 |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명호리 |
입향지 |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흥룡리 |
세거|집성지 | 경상남도 하동군 횡천면 애치리 |
세거|집성지 |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흥룡리 |
성씨 시조 | 박언침 |
입향 시조 | 박영석|박영창|박첩동 |
[정의]
박언침을 시조로 하고 박영석·박영창·박첩동 등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하동군의 세거 성씨.
[개설]
밀양 박씨는 박혁거세를 원조(元祖)로 하고, 경명왕(景明王)[917~924]의 첫째 아들 박언침(朴彦忱)[밀성대군]을 시조로 한 우리나라 고유한 성씨이다. 밀양 박씨는 고려 중기 이후 크고 작은 분파(分派)를 이루고 번성하여 많은 지파(支派)가 존재한다. 하동 지역의 밀양 박씨는 규정공파(糾正公派)[밀성대군 16세손 박현(朴鉉)이 파시조]가 대부분이며, 밀양 박씨 은산공파에서 갈라져 나온 우당공파(憂堂公派) 일부가 하동군 고전면에 세거하고 있다.
[연원]
신라 개국시조 박혁거세를 원조로 하고, 29세손 경명왕의 첫째 아들 박언침이 밀성대군[밀양]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박언침을 시조로 하여 밀양을 본관으로 삼았다. 밀양 박씨는 모든 박씨 가운데 제일 종가이며, 우리나라 본관별 인구에서도 김해 김씨 다음으로 많다. 밀양 박씨의 세계(世系)는 밀성대군의 7세손인 박언부(朴彦孚)[고려 문종 때 문하시중]를 중시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에서 종파(宗派)인 은산공파(銀山公派) 박영균(朴永均)과 행산군파(杏山君派) 박세균(朴世均)으로 분파되었다. 이외에도 도평의사사사공파(都評議使司使公派)·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판도공파(版圖公派)·좌윤공파(左尹公派) 등으로 대별된다. 또한 여러 개의 작은 분파로 나뉘어져서 간략하게나마 전체를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다.
[입향 경위]
하동군 횡천면 애치리 애치동(艾峙洞) 소재의 「규도재사실기(糾度齋事實記)」를 보면 애치동에 밀양 박씨 규정공파가 들어와 세거하기 시작한 시기는 임진왜란 때였다. 애치동 입향조인 박영석(朴永碩)·박영창(朴永昌) 형제의 증조부 박도형(朴道亨), 조부 박천민(朴天民), 아버지 박진필(朴進弼) 등은 이미 하동군 고전면 범아리(泛鵝里)에 세거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박진필이 죽자, 그의 아내 김해 김씨가 두 아들을 데리고 애치동에 정착하면서 세거지가 되었다. 그리고 밀양 박씨 규정공파 19세손이 하동군 청암면 명호리에, 규정공파 25세손이 금성면 갈사리에 입향하여 세거하였다.
하동군 하동읍 흥룡리 호암마을에 있는 「원모재기(遠慕齋記)」를 참고하면 밀양 박씨가 하동읍 흥룡리에 입향한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일 것으로 보인다. 좌승지(左承旨) 박첩동(朴堞東)[1580~?]이 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13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피난 중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박첩동은 꿈속에서 만난 신인의 도움으로 호암마을에 자리를 잡고, 이후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현황]
통계청의 성씨와 본관 자료에 의하면 2000년 전국의 밀양 박씨는 94만 6307가구 모두 303만 1478명이며, 하동에 거주하는 밀양 박씨는 1,170가구 3,283명이다. 하동 지역의 밀양 박씨 세거지는 하동군 하동읍 흥룡리와 횡천면 애치리 등이고, 뚜렷한 집성촌은 없으나 하동 입향 이후 후손이 적지 않게 번성하였다.
[관련 유적]
‘원모재’는 하동군 하동읍 흥룡리 호암마을에 있는 밀양 박씨 재실로서 입향조인 승지공 박첩동을 비롯한 선조를 시향하는 곳이다. ‘규도재’는 하동군 횡천면 애치리 애치동에 있는 밀양 박씨 재실이다. 이외에 밀양 박씨 재실은 하동군 금성면 갈사리 나팔마을의 호경재(湖景齋), 청암면 명호리의 훈송재(薰松齋)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