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1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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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璟鎬 |
영어음역 | Yi Gyeongho |
이칭/별칭 | 이경호(李景鎬),이경호(李敬鎬),기옥(基玉),농은(農隱),성재(城齋)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29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현덕 |
출생 시기/일시 | 1890년 6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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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23일 |
몰년 시기/일시 | 1920년 5월 14일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291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하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경호(李璟鎬)[혹은 李敬鎬로도 씀]는 1890년(고종 27) 6월 17일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291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한학을 공부했던 이경호는 1910년 경술국치의 비보를 듣고 3일간 식음을 전폐하였다. 그리고 붉은 글씨로 ‘항일 투쟁’, ‘일본 타도’를 써서 벽에 붙여두고 항일 투쟁의 의지를 다졌다. 이후 성천서당(城川書堂) 제자들에게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다 일제의 압제가 심해지자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가 6년간 살았다.
귀국 후 가사를 돌보던 이경호는 1919년 3월 하동군 양보면에 있는 일신학교 교원 정섬기(鄭暹基)와 정성기(鄭成基)·정세기(鄭世基)·정이백(鄭伊伯) 등과 하동읍 장날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이경호는 정섬기의 자형이고, 정섬기와 정성기는 재종간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3월 22일 태극기 수십 본을 제작하고 인근 동리에 연락을 취하여 의거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3월 23일 하동읍 장날, 이경호와 애국 청년들이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자 800여 명의 군중도 태극기를 흔들며 동참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하동경찰서에 연행된 이경호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진주감옥으로 이송되어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 회부되었다.
법정에서 판사가 “앞으로 충실한 일본국의 백성이 되겠는가?”라는 질문에, 이경호는 “나는 대한의 개가 될지언정 오랑캐 일본의 신민은 되지 않겠다!”라고 외쳤다. 결국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대구감옥에서 복역 중 간수를 구타하여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고문 후유증으로 1920년 5월 14일 만 30세의 젊은 나이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묘소]
1994년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