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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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現代史-轉換點5.18民主化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은옥 |
[정의]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신군부 세력에 맞서 광주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하여 항거한 사건.
[개설]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광주 시민이 중심이 되어 민주 정부 수립, 신군부 세력의 퇴진,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주화운동이다. 신군부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공수부대를 투입하였고, 폭력 진압으로 인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신군부의 언론 통제로 인하여 광주에서 벌어지는 사태가 알려지지 않고 있었으나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5.18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1980년 5월 27일 광주 시민군이 계엄군에 의해 진압되면서 종결되었다.
[원인]
1961년 4·19혁명으로 일어난 민주주의 물결을 짓밟고 등장한 박정희 군부 정권은 장기 집권을 위해 1972년 10월 27일에 유신헌법을 선포했다. 유신헌법 철폐를 외치던 민주화운동은 1979년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으로 이어졌으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사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979년 12월 12일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군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국가 권력까지 찬탈하였다. 신군부는 국회와 내각을 무력화시키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비상계엄 확대 조치, 국가보위비상기구를 설치하여 정국을 주도하려 하였다.
[전개과정]
이에 1980년 5월, 대학생들은 '계엄령 해제', '정부 개헌 중단', '유신 잔당 퇴진' 등을 외치며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하고 1980년 5월 10일 전국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유신 잔당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에 광주에서는 1980년 5월 16일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을 중심으로 한 대학생들이 도청 앞 광장에서 대중집회를 열고 평화적인 횃불 행진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경찰은 1980년 5월 17일 전국 55개 대학, 학생 대표 95명을 연행하였고,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준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실시하며 계엄군을 주둔시키기 시작하였다. 광주 내에도 '화려한 휴가'라고 명명된 작전명령을 받은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가 투입되어 전남대와 조선대에 있던 민주화운동 세력을 진압하였다. 이들은 곧바로 도서관, 총학생회실 등에서 철야를 하던 학생들을 급습하여 곤봉과 군홧발로 구타한 후 체포하였다. 이 날 전남대와 조선대, 광주교대에서 체포된 학생은 모두 112명이었다.
1980년 5월 18일 10시경,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막아 세웠다. 이에 학생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계엄군은 잔혹한 폭력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만류하려던 시민들 또한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하였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광주 지역의 대학생들은 시내로 쏟아져 나와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농성을 하기 시작하였다. 계엄군은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를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대응하였다. 계엄군은 학생처럼 보이는 청년들을 무조건 쫓아가서 곤봉으로 때리고 구타하였다. 또한 조금이라도 사람이 모이면 해산이라는 위협과 폭력을 가하는 모습에 광주 시민들은 점차 분노하기 시작하였고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다. 전국 모든 지역에서 학생 운동 지도부의 지도력이 마비된 상태였기 때문에 시위 자체가 힘들어지는 상황이 되었지만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거셌기에 계엄이 확대되는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즉각 저항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계엄군에 맞서 저항한 지역은 광주뿐이었다. 이 날 광주 시내 일원은 오후 9시로 통금이 정해졌다.
1980년 5월 19일 오전 10시경, 금남로에 모여든 시민들은 3,000~4,000명으로 불어났으며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모인 시민들을 향해 계엄군과 경찰은 확성기와 군 헬기를 동원하여 해산할 것을 종용하였다. 10시 40분부터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적극적으로 시민들을 해산시키려 하였다. 계엄군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시위 장소에 있던 시민들을 진압하였다. 이러한 폭력은 시내 중심가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광주 시가지 전체에서 벌어졌다. 시외로 빠져 나가기 위하여 버스에 탄 학생들이 잡혀갔고, 버스나 택시를 몰던 운전기사들도 폭행을 당하였다. 곳곳에서 부상자가 속출하자 이들을 옮기려는 택시기사들도 공수부대가 목격하면 집단 구타를 자행하였다. 이를 보다 못한 진압 경찰들이 광주 시민들에게 제발 집에 돌아가라고 부탁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오후 4시경부터는 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고등학생들은 방과후에 수십 명씩 짝을 지어 시위대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오후 5시 10분경 시민과 공수부대의 대치 상황 중 조대부고 김영찬 학생이 총에 맞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18일 계엄군에게 영문도 모른 채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였던 청각장애인 김경철도 사망하였다.
1980년 5월 20일, 계엄군은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전화를 차단하였다. 점심시간 이후 광주 시가지는 다시 팽팽한 대치 상태로 접어들었다. 10만 명이 넘는 광주 시민들이 금남로에 모여들었다. 오후 3시, 금남로의 시위대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이에 맞서는 경찰의 최루탄이 터지기 시작하였다. 시민들과 경찰 사이에 공방전이 시작되었으며, 대치하였다 다시 몰려들었다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러는 도중 계엄군의 저지선 전면에 섰던 경찰 병력이 빠지고 공수부대가 앞쪽으로 배치되기 시작하면서 무자비한 폭력과 시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전남도청 앞 광장으로 통하는 모든 도로에는 시민들의 대열이 물결처럼 밀어닥쳤다. 직접 시위에 참여하기 어려운 여자들과 노약자들은 물이나 간식, 돌 등을 운반하는 것으로 지원하였다. 오후 6시, 금남로에 버스, 화물차, 택시 등으로 구성된 차량 시위대가 출현하였다. 그들은 공수부대의 만행에 흥분하였고 시민들의 투쟁 대열에 동참할 것을 결의하고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켠 채 시위를 시작하였다. 이 날의 차량 시위는 광주 시민들의 자발적인 항쟁을 새로운 단계로 고양시킨 계기가 되었다. 시위 인원은 20만 명이 넘어서고 있었다. 시민들은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방송국에 찾아가 항의했는데, 이 과정에서 광주MBC방송국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1980년 5월 21일 새벽 1시, 시민들은 국민들의 삶과 복지를 위한 세금이 군대의 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는 이유로 세무서 기물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세무서 무기고에 있던 카빈 소총 몇 자루를 입수하기도 하였다. 공수부대의 발포에도 불구하고 계속 밀려드는 시위대의 필사적인 노력은 결국 계엄군을 광주역에서 격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날이 밝고 아침이 되면서 시위대는 광주역 전투에서 사망한 시민의 시체 2구를 발견하였다. 이를 본 광주 시민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어 시위대는 스스로 무장을 시작하였다. 진압 차 내려오던 육군 제20사단 사단장의 지휘용 차량을 탈취하고, 아세아자동차 공장으로 몰려가 APC 장갑차 등을 징발하였다.
오전 10시경, 시민대표 김범태[조선대 법대 1년], 전춘심[가정주부]과 도지사와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무력한 도지사는 시민들의 요구 사항을 단독으로 수용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는 시민들의 완전무장과 치열한 시가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광주사태를 불순분자 및 간첩들의 파괴·방화·선동에 기인한 것으로 단정하고 계엄군의 자위권을 강조한 '광주사태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오전 10시 10분 쯤 도청 광장에 있던 공수부대에는 이미 실탄이 지급되었다. 이는 시민들을 향해 발포가 허가되었음을 의미하였다. 오후 1시 정각, 시위대와 계엄군과 충돌을 하는 도중 전남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애국가에 맞춰 일제히 총성이 울렸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계엄군의 사격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시민들도 총이 필요하였다. 총을 확보하기 위해 광주 근교의 화순, 나주, 영산포, 장성, 영광, 담양 등지에서 다이너마이트, 카빈 소총 600여 정, M1 소총 200여 정, 탄약 5만 발 등을 노획하였다. 이들 무장시위대는 광주 시민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시민군'으로 불렸다.
시가전이 한창이던 오후 5시경, 시민군이 전남의대 부속병원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하여 계엄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계엄군은 오후 5시 30분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저녁 8시, 드디어 시민군은 교도소를 제외한 광주시의 전 지역에서 계엄군을 몰아내고 승리를 쟁취하게 되었다. 총격 전 이후 광주 시내의 모든 병원들은 환자로 가득 찼다. 버스나 택시들은 부상자, 시체들을 실어날랐다. 병원 앞에는 시위에 참여하지 못했던 여자들, 심지어 아이들까지 헌혈을 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1980년 5월 22일, 시민들은 계엄군이 물러간 광주 시내를 깨끗이 청소하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오후 12시 30분경 신부, 목사, 변호사, 기업가, 정치인 등으로 구성된 15명의 '5.18 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 철폐, 전두환 퇴진 등 시민들의 요구가 반영되지 않은 수습안을 결정하였고, 계엄당국과의 협상 또한 실패하여 향후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와 더불어 대학생으로 구성된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 날부터 매일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시민궐기대회에서는 사건의 진상과 정황을 알리는 성명서와 민중신문인 투사회보 등이 배포되었고,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하여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시민들은 주먹밥과 빵 등을 대가 없이 나누어 먹었고, 부상자들을 돕기 위한 헌혈도 계속되었다.
1980년 5월 26일 새벽 5시,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워 광주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이 도청 상황실로 보고되었다. 김성용 신부, 이성학 장로를 비롯한 수습위원들은 맨몸으로 탱크의 진입을 저지하려 도로 위에 드러눕기도 하였다. 궐기대회를 마친 밤, 도청 안에서는 수습위원들이 계엄군의 진압작전을 알리며 도청을 떠날 것을 종용하였다. 지도부는 이미 궐기대회 때 최후까지 싸울 수 있는 사람만 남아달라 말을 전하였고, 최후까지 남은 시민들은 약 150여 명이었다.
1980년 5월 27일 0시 정각, 도청 상황실의 전화가 끊겼다. 홍보부 박영순[송원전문대 보육과 2년]은 홍보 차량에 올라 새벽 3시까지 광주 시내 전역을 돌며 마지막 가두방송을 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새벽 4시경, 계엄군은 항복을 권유하는 최후 통첩을 하였고 1시간의 교전 끝에 항쟁은 진압되었다.
[역사적 의의]
6월민주항쟁 이후로 국민들은 5.18민주화운동을 재인식하게 되었고, 인권운동단체들은 광주 시민 학살의 책임자 처벌과 진상 규명을 요구하였고, 1988년 13대 국회에서 '5.18 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광주청문회가 열리게 되었다.
광주청문회를 통해 신군부가 저지른 반인륜적 만행의 진상을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나 책임자들은 책임 회피에만 급급하였다. 결국 1995년 김영삼 정부 시절 「5.18 관련 특별법」제정이 추진되었고 본격적인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1997년 4월 29일, 5월 18일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고, 1997년 5월 16일에는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에 새로운 5.18묘지가 완성되었다. 1997년 5월 18일에는 정부 주관 하에 첫 5.18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5.18묘지는 2002년 7월 27일에 국립묘지로 승격되어 광주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성지가 되었다.
2011년 5월 25일,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는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국가 권력에 저항했던 광주 시민들의 희생 정신을 국제 사회가 공인한 것이며, 5.18민주화운동 당시 나타난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민주, 인권, 평화 정신을 전 세계인들과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뿐만 아니라 홍콩, 미얀마 등 세계 민주화 물결에도 많은 영감과 용기를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