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B030103 |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다일 |
가리봉동 골말경로당에서 만난 윤재병[1932년생] 씨는 평생을 가리봉동에서 살았다.
윤재병 씨에게는 위로 누이 두 분과 형님 한 분이 계셨다. 아버지는 윤재병 씨가 세살 때 돌아가셨고, 다섯 살 터울의 맏누이 윤묘병[1927년생] 씨가 어머니와 함께 동생들을 돌봤다.
경로당에서 만난 노인들의 얘기 가운데 한결같은 것이 있었다. 모두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는 것. 지금 여든을 넘긴 노인들은 대부분 그랬듯이 이들이 태어난 시대는 일제 강점기였다. 일본말을 쓰고 일본 사람들과 살았다. 가리봉동에서도 그랬다. 가리봉동과 골말 사이의 언덕에는 일본 사람들이 하던 복숭아 과수원이 있었다. 학교는 일본 아이들과 한국 아이들이 같이 다녔다. 비율로 따지면 절반 정도다. 그러다가 1945년 일제 강점기가 끝났다. 잠시 조용한가 싶더니 6·25전쟁이 일어났다. 윤재병 씨 형제들은 이 과정을 모두 지켜봤다. 게다가 지금까지 가리봉동에 살면서 가리봉동의 변화 과정도 모두 지켜봤다.
[영등포로 나가서 시작한 돈벌이]
윤재병 씨는 어릴 때부터 일을 시작했다. 동네에 논이 많은 집안일을 도와준 것이 시작이다. 여름 한철 농번기에 도와주고서 70원을 받았다. 그때가 1948년, 열여섯 살 때였다. 당시 쌀 한 가마에 9원이었으니 적지 않은 돈이었다. “그때 내가 열여섯 살이었어. 머리를 썼지. 돈을 한번 불려 보자 그랬지.”
윤재병 씨는 그 돈으로 일을 시작했다. 가리봉동에서 십리 거리에 있는 시흥으로 갔다. 천안을 오가는 기차가 시흥에 섰기 때문이다. 증기 기관차에 가서 포대 자루 세 개를 석탄으로 가득 채웠다. “기차 운전수가 어린것이 고생한다고 포대 자루에 가득 담아 줘. 그때는 탄이 커서 그걸 다시 작은 포대에 나눠 담으면 여섯 포대가 됐어. 그걸 짊어지고 다시 영등포로 갔지.”
윤재병 씨는 이때 이른바 석탄 유통업을 시작하였다. 시흥의 기차에서 석탄을 싸게 가져다 영등포 가정집에 팔았다. 영등포에는 비교적 부유한 주택들이 있었다. 특히 ‘양색시’라 불리는 미군들과 함께 사는 여성들의 집이 있었는데 그곳이 윤재병 씨의 주 고객이 됐다. “영등포 집에 석탄을 갖다 주면은 어린나이에 고생한다고 ‘붓고 들어와.’ 그러지. 그러면 집 앞에 있는 탄통에 석탄을 붓고 들어가는 거야. 밥도 한 끼 얻어먹고 돈도 벌고 그랬지.”
그렇게 시작한 일이 영등포와 시흥을 오가며 계속됐다. 때마침 가리봉동이 영등포와 시흥의 중간 지점이어서 오며 가며 장사를 하긴 좋았다. “그렇게 번 돈이 70만 원이야. 아마 지금 돈으로 하면 7억은 될 꺼야. 7천만 원도 아니고 7억.” 윤재병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군에 다녀오니 다시 빈털터리로]
윤재병 씨는 그렇게 번 돈으로 논 네 마지기와 돼지 20마리, 소 한 마리를 샀다. 26평[85.95㎡]짜리 땅도 사서 거기 축사를 짓고 집도 지었다. “거기서 말뚝치고 돼지를 기르는데 도대체 먹는 걸 감당을 못하겠어. 구정물을 먹여도 감당을 못해.”
그래서 윤재병 씨는 또 일을 시작했다. 영등포에 있는 ‘애경유지’를 다녔다. 공장을 다니면서 점심시간에는 집으로 와서 돼지 밥을 주고 다시 공장으로 갔다. 십리 길을 매일 두 번씩 왕복했다. 그래도 돼지 밥을 감당할 수 없어서 자전거를 사서 술지게미를 가져다 먹였다.
돼지들이 먹는 양이 점점 늘어나자 자전거를 리어카로 바뀌고 그 만큼 부자가 됐다. “돼지들이 크니까 리어카로 술찌꺼기를 실어다 먹였지. 그러니까 돼지들이 술에 취해 가지고 씩씩 거리고 자는 거야. 허허.”
그때 윤재병 씨의 나이 23세 때였다. 일을 시작한 지 7년 만이었고 형님이 해병대에 갔다가 돌아온 때다. “형님이 군에서 돌아오니까 영장이 즉각 나오더라고. 그래서 논산훈련소로 들어갔지. 그때는 군대가 3년이었어. 가면서 형님한테 ‘소도 팔아먹지 말고 돼지도 지금 팔아먹지 말고 좀 크면 팔아먹고, 논도 잘 관리해 달라’고 얘기하고 갔지. 근데 3년 뒤에 돌아와 보니 아무것도 없더라고. 형님이 술 드시고 놀음하고 다 날리셨어.”
다시 빈털터리가 된 윤재병 씨는 골말에서 다시 인생을 시작했다. “여기 가리봉동에서 부자동네는 저 건너편이야. 우스갯소리로 그랬어. 여기 골말은 맨날 ‘골골댄다’ 해서 골말이라고. 그 시절엔 그랬어. 사람들이 도박도 많이 하고 남자들이 땅 팔아 술 먹고 그랬지. 지금이야 다 지난 일이니까 뭐 그냥 웃으면서 얘기 하는 거야.”
사실 ‘골말’은 ‘골짜기의 끝’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지명이다. 가리봉동 골말 역시 골짜기의 끝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지만 윤재병 씨는 어려웠던 옛날 일을 생각하며 ‘골골거려 골말’이란 말을 했던 것이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