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B03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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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다일 |
2010년을 지나고 있는 현재 구로구 지역은 첨단 디지털 도시로 탈바꿈했지만 1970년대 구로구는 우리나라 산업화의 중심지였다. 굴뚝 공장은 구로구의 상징처럼 인식됐고, 수출 공업 단지의 대명사가 됐다. 일자리가 많으니 당연히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시골에서 상경한 십대들이 가리봉동에 살면서 구로구의 공장으로 일하러 가는 것이 익숙한 풍경이었다.
[재봉일을 하다가 차린 세탁소]
가리봉시장 에서 세탁소를 하고 있는 김영미[가명] 씨는 40년 전인 1970년 가리봉동을 찾아왔다.
당시 17세의 소녀가 동생 둘을 데리고 무작정 상경한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해서 당장 먹고 사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던 시절, 별다른 방법이 없어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 그래도 쉽게 취업되는 곳이 가리봉동 공장이었으니, 처음에는 재봉사 옆에서 옷감이나 실을 나르고 허드렛일을 맡아하는 것으로 가리봉동 생활이 시작됐다.
그렇게 김영미 씨는 가리봉동에서 공장을 다니다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아이들은 구로동과 가리봉동에서 학교를 나왔고, 지금은 대학을 졸업해 딸은 시집가고 아들은 회사에 다니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바뀐 것도 있다. 공장이 해외나 지방으로 이사한 것도 큰 변화 가운데 하나였다. 김영미 씨는 끝까지 가리봉동에 남기로 하고 공장에 다니던 기술을 바탕으로 세탁소를 인수했다. 지금은 시장 끝에 남아 있는 오래된 세탁소, 동네 주민들이 바짓단을 줄이거나 드라이클리닝을 위해 찾는 곳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 간 곳]
구로공단에 있는 공장은 시골에서 상경한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되기도 했고 민주화 운동을 하는 젊은이들의 피난처와 임시 생계의 터전이기도 했다. 대부분이 그저 평범한 직공으로 생활하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늙어 갔지만, 그중 어떤 이들은 국회의원이 되기도 하고 다시 가리봉동에 돌아와서 봉사 활동을 하기도 했다. 김영미 씨에 따르면 “공장에서 일할 때는 워낙 사람이 많으니 누가 오고 누가 가는지도 몰랐다.”며, 나중에 소문으로 들어 보니 “대학생이 경찰을 피해 취업하기도 했고, 벌집에서 몇 달 간 숨어 살기도 했다.”고 말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