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B020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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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다일 |
1960년대 후반부터 불어 닥친 산업화의 바람은 구로구의 모습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농사를 짓던 가리봉동 일대에도 거대한 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주로 섬유 공장과 가발 공장이 많았다. 당시의 공장들은 기계화나 산업화보다는 다수의 인력을 투입해서 제품을 만드는 제조업이었다. 따라서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가리봉동 일대에 보다 많은 주거지가 필요했다.
[대를 이어 운영하는 벌집]
가리봉동에서 벌집을 운영하는 김정득[1947년생] 씨는 친정어머니가 하던 벌집을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김정득 씨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이곳 가리봉동에 살았었지만, 그때 김정득 씨네 집은 평범한 농가였다. 동네는 논밭이었고 길은 꼬불꼬불해서 영등포에 있는 학교를 오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 김정득 씨가 가리봉동을 떠난 것은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다.
이때가 가리봉동에 공장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몰려오던 1970년대였다. 이후 김정득 씨의 부모님은 살던 집을 팔고 같은 동네에 있는 넓은 집을 샀다. 공장 다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세를 주기 위해서였다. 이후 20칸의 방을 만들고 각각 출입문을 달았다. 공동으로 쓰는 화장실을 만들었고, 겨울에도 따듯하게 연탄보일러를 놨다.
그 뒤로 공장 사람들이 주로 찾았던 벌집은 꾸준히 부모님의 수익원이자 생활 공간 역할을 했다. 하지만 공장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한 1990년대 초반에는 가리봉동 벌집도 변화가 필요했다.
빈 방들이 늘어났고 벌집을 하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나섰다. 가게를 차린 사람도 있고, 집과 땅을 팔고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다. 가리봉동 벌집에도 한파가 불어 닥쳤다.
[벌집촌의 새로운 거주자 중국 동포들]
1995년 즈음 벌집촌의 거주자가 바뀌기 시작했다.
공장을 다니는 한국인 노동자들 대신 일자리를 찾아 한국으로 온 중국 동포들로 바뀐 것이다. 2000년 김정득 씨도 아이들이 모두 장성하자 친정 부모님이 살고계신 가리봉동으로 다시 들어왔다. 연로하신 부모님의 일을 도우면서 살기 위해 고향으로 온 것이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김정득 씨는 대를 이어 벌집을 운영하고 있다. 20가구의 벌집 거주민들과는 가족처럼 지낸다. 대부분이 중국 동포고 한국 사람도 작은 사무실을 하기 위해 벌집을 빌려서 사업을 하고 있다.
김정득 씨가 가리봉동으로 돌아온 2000년에는 IMF 구제 금융의 여파로 실업자와 노숙자가 절정을 이룬 때였다. 당시 가리봉동에는 일용직 일자리가 많다는 소문이 돌면서 벌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벌집에 들어올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길에서 노숙을 했다. 노숙자를 위해 밥 퍼 주는 봉사도 하던 김정득 씨는 “한국 사람들 어려울 때도 많이 도와줬고 지금은 중국 동포들 처음 오면 ‘이렇게 해야 돈 벌어 돌아갈 수 있다’고 충고도 하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득 씨는 “처음에는 어머님이 하시던 벌집이 탐탁지 않았어요. 사람들도 거칠고 신경 쓸게 많았거든요. 그런데 10년쯤 제가 운영을 해 보니 나름대로 요령도 생기고 괜찮아지네요. 저도 점점 나이를 들어가니까 벌집처럼 꼬박꼬박 현금이 들어오는 일이 어디 있을까 싶어서 계속 운영하려고 해요.”라고 말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