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B01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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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다일 |
구로동의 소식을 많이 전하는 구로구의 지역 신문 『구로타임즈』 2006년 12월 5일자 기사에 가리봉1동의 옛 지명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청룡이 파서 마시던 물에서 유래」했다는 김윤영 기자의 기사에서 가리봉동은 “산업 단지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밤나무골, 사당골, 석바탱이, 큰논배미, 모아래 등 훈훈한 옛 지명이 말해 주듯 호박밭이 넓게 펼쳐진 몇 가구 살지 않은 한산한 농경 지역이었다.”라고 묘사되고 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온 땅이름 모아래]
가리봉동은 넓은 농지가 있어서 벼농사에 적합했고 수확도 좋아 여러 채의 기와집이 대를 이어 살아가는 기름진 땅이었다. ‘모아래’는 지금의 가리봉1동 지역을 말하는데 500년 동안 대를 이어가며 가리봉동에 살아온 박명재[1932년생] 씨의 집도 바로 ‘모아래’에 있었다.
『구로구지』에는 모아래에 대해 “40여 세대가 모여 살면서 유래된 마을이며 원래 청룡 한 마리가 잠을 자고 있던 청룡혈의 산이었으나 갈증이 난 용이 물을 먹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던 중 자기가 잠을 자던 산 아래쪽 땅 속으로 물이 흐르고 있음을 알고 못을 파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저수지가 생겨났고 이 저수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그 아래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못아래마을이라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구로구지』에 ‘모아래’라고 표기하고 있는 곳을 가리봉동 주민 중에는 어떤 이는 ‘모아래’라고 부르고 어떤 이는 ‘무아래’라고 알고 있었다. 가리봉동 경로당을 돌아보며 들은 명칭은 글자로 전해지기보다는 어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이라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다. 어찌됐든 마을 노인들이 기억하는 모아래[또는 무아래]는 기름진 땅이었다.
박명재 씨는 “우리 집안 밀양박씨가 여기서 500년을 살았어요. 그래서 기록으로 지명이나 유래 같은 게 남아 있을 것 같았는데 내가 아무리 찾아도 그런 기록을 찾을 수 없었지요. 아마 무슨 이유가 있어서 기록들이 없어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모아래를 지나 시흥 가는 길]
박명재 씨가 어렸을 때인 1940년대에는 가리봉동 근처에서 번화가로 꼽히는 곳은 지금의 영등포나 시흥 지역이었다. 영등포와 시흥 모두 기차역이 있어서 각종 교역의 장이자 경제 활동이 가능한 지역이었다. 가리봉동에서는 양쪽 모두 십리 길이었는데, 시흥으로 가려면 모아래에서 말미를 지나야 했고, 영등포로 가려면 모아래에서 도림천을 넘어 영등포까지 갈 수 있었다.
양쪽 모두 마차가 겨우 다닐 만한 좁은 길이었는데, 이 길을 따라 가리봉동 사람들은 시흥과 영등포에 있는 학교와 일터, 시장을 다녔다.
[언덕 너머 마을 골말]
한글학회가 1991년에 발간한 『한국땅이름큰사전』을 찾아보면 ‘골말’이라는 이름이 수백 개가 나온다. 서울과 경기도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 골말이라는 지역이 존재하는데, 사전에는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3동 지역에도 ‘골말’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직접 만나본 가리봉동의 주민들은 현재의 가리봉2동 지역을 지금도 ‘골말’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경로당 이름도 ‘골말경로당’이다.
골말경로당에서 만난 노인들은 “여기가 골짜기 끝이라 골말이라 불렀다고 하더라구.”라며 예전부터 전해진 명칭을 알려 줬다.
그런데 ‘골말’이란 명칭은 대부분 ‘곡촌’이나 ‘곡동’이라는 이름으로도 함께 불린다. 가리봉동의 ‘골말’ 역시 ‘곡촌’이란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었다. 골말경로당에서 만난 윤묘병[1927년생] 씨는 ‘명동’, ‘남산’, ‘새말’과 같은 명칭들이 전국에서 나타나는 것과 비슷한 이유로 ‘골말’ 역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윤묘병 씨는 일제 강점기에도 가리봉동 언덕 너머에 있는 산골 마을을 ‘골말’이라 불렀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골말’은 당시 습기가 많고 장마가 지면 물이 차는 동네였다고 한다. 또한 당시 복숭아나무를 많이 심었던 지역이었다고 기억해 냈다. ‘골말’은 주로 초가집이 많고 생활수준도 지금의 가리봉1동보다 열악했다고 경로당에서 만난 노인들은 전했다.
[개발로 사라지는 지명들]
박명재 씨는 지역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아쉽다며 옛 기억을 더듬었다. “지금 삼화인쇄소 자리 옆으로 보면 좁은 길이 있어요. 거기를 ‘사당골’이라고 불렀어요. 아마 사당이나 뭐가 있었나 봐요. 나도 사당을 보진 못했으니까 무척 오래 전에 사라진 것 같네요. 또 지금의 남구로역 4번 출구 앞에. 거기가 옛날에는 집이 없고 그냥 고개였어요. 낮은 고개. 거기를 석밭고개라고 불렀지요.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 노인들이 많아요. …… 왜 거기를 석밭고개라고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지나가면서 돌을 던져 놓는 거 있잖아요? 요즘도 산에 가면 많이 하는 그런 거. 그게 거기 있었거든요. 그래서 석밭고개라 불렀는지도 모르겠어요.”
박명재 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찾아본 결과 1965년 한글학회에서 발간한 『한국지명총람』 서울 편에 ‘석바탱이‘라는 지명이 나왔다. 책에는 “대촌마을의 일부분으로 서쪽 귀퉁이에 있으며, 매사냥할 때 석단을 고이었다 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석바탱이고개’는 ‘석바탱이마을 뒤 고개’라는 설명도 있어 이곳이 석밭고개, 석바탱이고개라고 불렸던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다.
이렇듯 옛날부터 내려오는 마을 이름도 있지만 동네 사람들이 잠시 부르던 명칭들도 있었다. 박명재 씨의 기억으로는 1940년대 가리봉동을 ‘대촌’ 또는 ‘백오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것.
당시 인근 지역에선 드물게 50~60호의 가구가 모여 사는 큰 마을이란 뜻이다. 박명재 씨는 “이런 건 행정 구역으로 부르는 이름은 아니지만 당시 동네 사람들은 여러 가구가 모여 사는 가리봉동을 대촌(大村)이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박명재 씨가 기억하는 지명들 중에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도 있었다. 『한국지명총람』 서울 편에는 가리봉동 2리를 ‘대촌’이라고 적고, 가리봉동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마을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지금의 남구로역 4번 출구 앞을 보고 ‘석밭고개’라고 부르는 사람이나 가리봉동을 보고 ‘대촌’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동네 경로당에서도 거의 없었다.
이를 두고 박명재 씨는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늙어서 죽으니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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