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교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13198
한자 白橋里
영어공식명칭 Baekkyo-ri
이칭/별칭 한교(寒橋),한다리,흰다리,일교(一橋)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경기도 구리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손승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변천 시기/일시 1914년 - 백교리 양주군 구지면 백교리에서 양주군 구리면 교문리로 변경

[정의]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을 구성하는 마을의 이름.

[명칭 유래]

조선 시대에 발행된 지도에는 한교(韓橋), 고문서에서는 일교(一橋), 일제 강점기의 기록에는 백교(白橋)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1956년에 발간된 『경녕군파 선원 이씨 세보』에 그려진 지도에는 대교(大橋)로 표기되어 있다. 이곳의 원래 지명은 한다리이다. 한다리 명칭이 일제 강점기에 흰다리로 발음되기 시작하였고, 이를 다시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백교(白橋)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지역 주민들에 따르면, '한다리'가 옳은 명칭이다. 예로부터 한다리로 불리던 것이 한자로 표기되면서 한교(寒橋)라 기록되기도 하였고, 한자화한 명칭인 한교를 한글 명칭으로 간주하여, 한교를 다시 한자화하면서 일교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형성 및 변천]

1914년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양주군 구리면 교문리가 되었으며, 1973년 구리읍 승격과 함께 양주군 구리읍 교문리에 속하였다. 1980년 양주군에서 분리하여 남양주군 구리읍 교문리로 소속이 변경되었으며, 1986년 구리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구리시 교문동으로 편제되었다. 교문동이라는 명칭은 백교리(白橋里)의 '교'자와 이문동(里門洞)의 '문'자를 따서 생겨난 것이다. 현재는 백교리보다는 한다리 마을로 더 알려져 있다. 주변 농경지보다 고도가 높아 홍수 피해가 적기 때문에 일찍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였고,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 때에는 침수 피해를 입은 벌말, 토막, 돌섬 등지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이주해 오기도 하였다.

구리시가 도시화를 경험하면서 넓은 지역에 걸쳐 시가지가 발달하였지만, 아차산 동사면에 자리한 백교리 일대는 아직도 전형적인 농촌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 아차산을 등지고 전방에는 탁트인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주변의 농경지에서는 근교 농업이 발달하면서 시설 재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본래의 백교리아차산의 동남사면에 형성된 골짜기의 마을들을 아우르는 명칭이었지만, 현재는 백교 저수지 아래에 들어선 한다리 마을을 가리킨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구리시 교문 1동에 속하고, 법정동은 구리시 교문동에 해당한다.

[관련 기록]

일제가 1880년대에 작성한 『구한말 지형도』 '송파진'에는 한교(寒橋)로 표기되어 있고 그 북쪽에 이문동이 있다. 1917년에 간행한 『신구 대조 조선 전도 부군 면리동 명칭 일람』에는 백교리(白橋里)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1926년에 제작된 『조선 지형도』 '뚝도'에는 백교(白橋)로 표기하고 '흰다리'라는 일본 문자를 병기해 놓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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