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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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群山米選組合 |
이칭/별칭 | 군산 미찬 조합,군산 미선 업자 조합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원기 |
설립 시기/일시 | 1921년 9월 20일 - 군산미선조합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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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21년 10월 1일 - 군산미선조합 노동자를 위한 야학교육 실시 |
개최 시기/일시 | 1922년 3월 25일 - 군산미선조합 임원 선출을 위한 제 2회 정기 총회 개최 |
창립 시기/일시 | 1923년 2월 4일 - 미찬 조합 군산 청년회 창립 |
최초 설립지 | 군산미선조합 - 군산 개복동 산정상 |
성격 | 노동 운동 단체 |
설립자 | 임만춘, 이성옥 외 |
[정의]
1920년대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 있었던 쌀 도정에 종사하는 노동자 중심의 노동 단체.
[개설]
일제에 병합된 이후 군산은 호남 평야와 인근 충청남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많은 양의 미곡을 반출하기 위한 미곡 수탈지가 되어갔다. 군산을 비롯한 전북 주요 평야 지대에는 일본인 농장이 들어섬과 동시에 대단위 간척 농장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일본인 자본가는 이 지역 평야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한국인들로부터 강압적 수탈을 통해 경제적 이윤을 취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일제는 더욱 원활한 미곡 수탈을 위해 수리 시설 정비 및 도로를 확충하였고 철도·항만을 새롭게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군산은 미곡의 대일 수출지로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증산 계획에 의해 군산 지역에 미곡이 집산되자 쌀을 저장하고 가공할 수 있는 미곡저장소 및 정미소와 같은 시설물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군산 지역 정미업은 이러한 시대 상황 아래에서 발전할 수 있었다. 정미소는 운반되어온 쌀을 생산하는 시설로서 대부분 논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거나, 운반 수단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도로나 강가 수로 주변 및 철도역 가까운 곳 등에 위치하였다.
이러한 환경이 갖추어진 군산 지역은 정미업이 발전을 하였고, 그 결과 일본인 자본가들은 경제적 부를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생성되었다. 반면 정미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일본 자본가들로부터 심한 노동 착취와 일본인 노동자와 차별을 받았으며, 고된 노동에 비해 적은 양의 임금을 받고 삶을 영위해야만 했다. 이러한 열악한 노동 현실은 3·1 운동 이후 유입된 사회 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노동 운동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즉, 일본인 자본가들로부터 받는 부당한 대우에 대해 노동 운동 단체를 중심으로 대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군산 지역에서는 1920년 이후 일본인 자본가들에 대한 대항과 민족 운동의 성격을 띤 노동운동 단체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군산미선조합도 그러한 상황 아래에서 설립되었다. 설립 이후 정미소 노동자들의 계몽과 각성을 촉구하는 선전대를 조직하였고, 일본인 자본가들의 폭력과 차별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설립 목적]
미찬업(米撰業)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애경상문(哀慶相問)과 교육을 보급할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변천]
1921년 9월 20일 군산 지역 미선공을 대표해 임만춘(林萬春), 이성옥(李成玉) 등이 미선공의 자각과 이익을 위해 회원 800여 명으로 구성된 군산미선조합을 설립하였다. 설립 이후 군산미선조합은 가장 먼저 미선공들의 교육을 위해 군산 미찬 조합 적성 야학교(群山米撰組合赤誠夜學校)를 설립하였다. 군산 적성 야학교를 통해 연극 및 학예회 등을 개최하여 노동자들의 의식을 계몽시키는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또한 군산에 청년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 단체가 없는 상황에서 1923년 2월 4일 조합장 김홍두(金洪斗)와 간부 김용철(金用哲) 외 10명의 발기로 군산 미찬 조합 청년회를 창립하였다.
군산미선조합은 조합장이 중심이 되어 총무·재무·서기부 등을 두고 운영이 되었다. 조합장 및 임원진들은 정기 총회 및 임시 총회를 통해 선출되었다. 1922년 3월 25일 개최된 제 2회 정기 총회에서 조합장 임만춘, 부조합장 김용철, 총무 이승옥(李承玉), 재무 서재학(徐載學), 서기 이성옥, 감독장 박두연(朴斗連), 평의원 강희봉(姜希奉), 간사 이근영(李根永), 차종오(車宗五), 공성의(孔聖儀)가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2년 11월 25일에는 조합장 김홍두, 부조합장 차주상(車周相), 총무 이판동(李判童), 회계 김영칠(金泳七), 서기 신봉산(申鳳山), 간사 차종오, 박두년(朴斗年) 외 평의원 18인이 새롭게 선출되었다. 선출된 임원진들 가운데는 차주상과 같은 사회주의 지식인들이 있었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노동 운동을 전개해 가면서 군산미선조합을 운영하였다.
군산미선조합 운영을 위한 운영비는 회원들의 내는 기금으로 충당되었다. 회원들은 자신들이 받은 노임 중 일부를 군산 미선 조합에 기증하였고, 이렇게 모인 운영비는 야학교 운영 등 군산미선조합 운영에 충당되었다. 또한 사무실 신축과 같이 많은 예산이 필요한 경우에는 회원들이 노동자로 참여하거나 연극이나 순회전시 등을 통해 모인 의연금을 통해 충당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군산미선조합에서는 미선공 노동자의 교육과 노동 운동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설립 이후 미선공 교육을 목적으로 군산 미찬 조합 적성 야학교를 설립하였다. 야학교 설립 당시 야학교 운영진은 교장 한상계(韓相契), 학감(學監) 서성열(徐成烈), 김용철, 강사 이정복(李貞馥)·김성곤(金成坤)·임희준(林煕準)·이판동(李判東)·공성의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군산미선조합 임원이었다. 이는 군산미선조합이 교육을 통해 노동자의 계몽 및 각성을 이루어 노동 운동을 전개해 나가고자 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군산미선조합에서는 군산 이외의 전라북도 지역 및 전라남도·충청남도 지역 노동자들의 교육과 계몽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군산 미찬 적성 야학교에서는 군산 계화 여학교(群山桂花女學校) 및 『동아 일보』·『조선 일보』 군산 지국과 합동으로 문예 활동 사진대를 조직하여 전라북도 각 지역을 돌며 순회 사진전 및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이를 통해 문화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에게 문화 향유 기회를 제공하였고 동시에 노동자들의 계몽을 촉구하였다. 문예활동과 전시회를 통해서는 회원 이외의 관람자들에게 관람료를 징수하였고, 지역 유지들로부터는 의연금을 기부 받아 조합 운영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민립 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민립 대학 설립 당위성을 알리는 선전 활동을 양악대(洋樂隊)를 조직하여 진행하였다.
노동 운동에 있어서는 군산 지역 노동 운동의 단결과 활성화를 위해 군산 노동 연맹에 가입하여 무산 계급의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고 교양을 도모할 계획을 세웠다. 또한 군산 지역 각 정미소들의 미선공들이 일본인 자본가들의 임금 인하에 항의하는 파업에 참여하자 파업에 동참하여 노동자들의 요구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의의와 평가]
군산미선조합은 군산 지역 7개의 정미소가 중심이 되어 결성된 산업별 노동조합의 성격을 띠고 있는 단체이다. 일제 강점기 한국에서 이런 산업별 노동조합은 직업별 노동조합이 발전한 이후의 모습으로 192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설립되는데, 이에 비하면 군산 지역은 빠른 시기에 산업별 노동조합이 설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군산 지역이 일제에 의해 산업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일본인 자본가에 대항한 미선공들의 노동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군산미선조합에서는 미선공들의 노동 운동을 노동 운동에 한정하지 않고 그 힘을 식민 통치의 부당함에 대항하는 민족 운동으로 이끌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활동의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