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B01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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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동락 |
[개실마을의 정신적 지주 김종직]
개실마을 사람들에게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어떤 존재일까? “우리 후손에게 점필재 할배[할아버지]는 삶의 사표이자 본보기입니다. 지난 칠십 평생 우리 할배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정말 애써 왔어요. 하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요. 그분이야 학문적으로 대학자요, 청백리의 위정자이자 올곧은 선비의 표상인데…… 만 분의 일, 천만 분의 일이라도 흉내라도 내면서 살아 왔는지 모르겠어요. 앞으로도 우리 개실마을의 후손들은 할배의 정신을 전승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길 낍니다.”
선산김씨[일선김씨] 종손의 말처럼 김종직 선생은 개실마을 사람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는 선조이다. 이는 마을의 다른 후손들에게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김종직 선생에 대한 후손들의 묘사는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대표되는 절개, 사림 정치로 대변되는 개혁 정치, 영남학파의 종조라는 조선 도학의 뿌리, 백성들을 우선으로 생각하여 선정을 펼친 위정자로 표현된다.
욕봉영묘수성군(欲奉靈苗壽聖君: 신령한 차 받들어 임금님께 축수코자 하나)
신라유종구무문(新羅遺種久無聞: 신라 때부터 전해지는 종자를 오랫동안 구하지 못하다가) 여금힐득두류하(如今擷得頭流下: 지금에야 두류산 아래에서 구하고 보니)
차희오민관일분(且喜吾民寬一分: 우리 백성 조금은 편하게 되는 것이 우선 기쁘네.)
죽외황원수묘파(竹外荒園數畝坡: 대나무 숲 황량한 동산 두어 이랑 언덕에)
자영조취기시교(紫英鳥觜幾時誇: 자영차·조취차 언제쯤 자랑할 수 있을까)
단령민료심두육(但令民療心頭肉: 다만 백성들의 고통을 덜게 하려는 것뿐이지)
불요농가속립아(不要籠加粟粒芽: 속립아 농에 담아 진상하기를 바라지 않네)
이 작품은 김종직이 40세 되던 1470년(성종 원년) 함양군수로 재임할 때 지은 「다원(茶園)」이란 시로 『점필재집』 권10에 수록되어 있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하기 전 함양군에서는 진상품으로 바치던 차가 생산되지 않아 매년 전라도에 가서 비싼 비용을 들여 구입했다. 이에 김종직이 지리산에서 차의 묘목을 구해 와 차밭을 만들어 백성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자 군민들이 그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선정비를 세우고 생사당을 지어 참배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개실마을 사람들에게 각인된 김종직의 애민 정신과 성리학적인 수기치인의 실천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어떤 점에서 김종직의 생애를 이해하는 것은 개실마을 사람들의 정체성을 밝히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영남 사림파의 종장이자,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마련한 김종직의 생애를 대략 정리해 본다.
[김종직의 생애와 활동]
김종직은 1431년(세종 13) 밀양의 서쪽 대동리(大洞里)[일명 한골]에서 아버지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와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에서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성장하면서 길재(吉再)를 계승한 아버지에게 가학(家學)을 전수 받았는데, 특히 어릴 때부터 시를 잘 지어서 이름을 크게 떨쳤다. 1448년(세종 30) 아버지를 따라 상경하여 ‘남학(南學)’에 입학하면서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1453년(단종 원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했고, 1457년(세조 3)에는 유명한 「조의제문」을 짓고, 1459년(세조 5) 과거에 급제하였다.
성장기의 김종직은 학문적으로는 정몽주(鄭夢周)-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정통 성리학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김종직은 1459년(세조 5)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급제 후 문행(文行)을 겸비한 문신으로 경연에 참여하고 여러 전적들을 열람함으로써 학식과 경험을 축적하였다. 1464년(세조 10) 왕의 잡학(雜學) 장려책을 반대하다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되어 영남병마평사(嶺南兵馬評事)로 여러 지역을 순행하면서 군사와 무비에도 경험을 쌓았다. 1467년(세조 13)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세조실록(世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470년(성종 원년) 함양군수로 부임하면서 문하에 학도가 운집하였는데, 여기에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도 있었다. 1476년(성종 7년) 선산부사로 부임했고, 1479년(성종 10) 이후 10여 년간 문한(文翰)·사관(史官)·경연관(經筵官)·전주(銓注)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맡았다. 하지만 집권 세력인 훈구파로부터의 심한 견제와 노령으로 인해 1489년(성종 20) 밀양으로 낙향하였다.
이처럼 김종직은 세조 초에 관직에 나선 후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문한직과 외직을 두루 거친 조정을 대표하는 학자였다. 그는 영남 사림파의 영수로서 사림 세력의 중앙 정계 진출의 기초를 놓았으며, 제자 교육과 성리학의 보급을 통해 사림 정치 성립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김종직은 밀양으로 낙향한 후 학문과 후학지도에 전념하다가 1492년(성종 23) 8월 19일에 작고했다.
사후에 사림파에서는 시호로 문충(文忠)으로 올렸으나, 훈구파의 주장으로 ‘문간(文簡)’으로 시호가 내려졌다. 성종이 그의 글을 찾자 조위(曺偉) 등이 정리하여 제출했으나 간행되기 전에 왕이 죽었다. 몇몇 문인들에 의해 시문이 간행되기도 했으나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年士禍)로 대역죄로 부관 참시되고 문집과 글, 현판 등은 모두 불태워졌다. 그 후 중종반정 이후인 1507년(중종 2)에 벼슬과 시호 등이 되돌려졌다.
1520년(중종 15) 후손들이 흩어진 글을 수집하여 선산에서 문집을 간행했고, 1580년(선조 13)에 연보와 『문인록』이 편찬되었다. 1689년(숙종 15)에 영의정에 증직되고 1708년(숙종 34) 9월에 ‘문충(文忠)’으로 시호가 다시 내려졌다.
[조선 도학의 연원이 되다]
김종직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조의제문」이다. 이 글은 김종직이 1457년(세조 3) 10월에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의제(義帝)]을 조문하는 내용으로,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의제에 비유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글이다.
뒤에 문인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관으로 있을 때 이 글을 사초에 적어 넣었는데, 이것이 무오사화의 발단이 된 것이다. 무오사화는 1498년(연산군 4) 7월 김일손 등 신진 사류가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이다. 성종 대 이후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인 사림파가 중앙에 등용되면서 훈구파와의 대립이 격심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 때 사초에 삽입한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 김일손 등 많은 사림들이 화를 입었으며, 김종직은 부관 참시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조선 시대 4대 사화 중 첫 번째 사화로 사초 문제가 발단이 되었다고 하여 ‘사화(史禍)’라고도 한다.
김종직은 학문과 문장, 행정 능력을 고루 갖춘 인물로 도덕과 문장, 인재 양성에 있어 당대 제일의 유종(儒宗)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의 사상은 한 마디로 15세기 후반 집권 세력인 훈구파에 대항해서 성리학적 윤리 질서를 확립하고 사림 주도형으로 향촌 사회를 건설하며, 훈구파의 전횡을 막고 이상적인 유교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개혁 정치를 추진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소학(小學)』을 수신제가와 학문의 기초로, 『가례(家禮)』를 성리학적 실천 윤리의 모범으로 삼았다. 그와 함께 유향소(留鄕所)의 운영과 향약, 향사례(鄕射禮)를 통해 재지 사족 주도로 향촌 질서를 확립 운영하고자 하였다. 그는 폭넓은 학문 체계와 역사에 대한 풍부한 식견은 물론, 대의명분과 충절을 강조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중앙 정계와 서울 중심에서 벗어나 재지 사족과 지방 문화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다.
김종직은 영남학파의 종조로서, 조선 시대 도학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즉, 그는 위로는 정몽주와 길재, 아버지인 김숙자의 학통을 이어 받아 아래로는 김굉필과 정여창을 거쳐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성혼(成渾), 이이(李珥)로 전수된 조선 시대 성리학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였다. 그는 훈구파가 집권하고 있던 조선 전기 사림파의 종장(宗匠)으로서 성리학의 정착과 사림 정치 수립에 기초를 놓은 성리학자 겸 문장가였다.
김종직은 성리학의 가정·사회 윤리를 실천하는 한편 경술(經術)과 사장(詞章)을 겸비하여 당대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칭송받았다. 나아가 평생 동안 후진의 교육 활동에 전념하여 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사림파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김종직이 꿈꾸던 포부와 신념들은 그의 문인들에 의해 다방면으로 계승 발전되어 조선조 사대부 문화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런 점에서 점필재 김종직은 명실공히 조선 도학의 연원이자 정맥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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