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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송정유계안』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1591
한자 碧松亭儒契案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신촌리 산 84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정동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서

[정의]

고령 지역 유계(儒契)의 운영 원칙과 참여자를 기록한 계안(契案).

[개설]

『벽송정유계안(碧松亭儒契案)』은 고령군 쌍림면 신촌리 산84번지에 있는 벽송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10호, 1985년 8월 5일 지정]에서 2011년 발굴되어,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에서 영인하여 학계에 소개하였다.

[형태]

현재 모두 13책으로 구성되어 전해지고 있다. 즉, 제1책인 「송정입의(松亭立議)」[1546년, 35×24.5cm, 10면]에서 제13책인 「기안(忌案)」[신축년(辛丑年) 2월, 42.7×26.5cm, 8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성/내용]

『벽송정유계안』은 유계(儒契)가 결성된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계를 운영하는 원칙[立議]과 참여자[座目]를 중심으로 작성한 것으로, 옛날 책[古書] 형식으로 된 일괄 고문서 자료이다. 「벽송정유계안는 벽송정을 매개로 고령 지역의 재지사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것으로, 16세기 초반에서 현재까지 500여 년 간 유지되어 온 된 계 조직이다. 이 유계는 벽송정을 경영 수호하고 유교적 이념에 입각하여 향촌 사회의 풍속과 기강을 바로세우는 것이 계 조직의 목적임을 표방하고 있다.

『벽송정유계안』은 1546년(세종 25) 처음 작성되기 시작하여 최근인 2004년에 까지 이어지고 있다. 즉, 계가 조직된 이후 470여 년 간 이어온 고령 지역 재지사족들의 삶의 자취들을 잘 전해주고 있다. 특히, 계원들의 명부라 할 수 있는 좌목(座目)을 통해 고령 지역 재지사족들의 시대별 변천 과정, 지역별 분포 상황 등 사회상을 파악해 볼 수 있다. 그와 더불어 벽송정이 현재까지 유지된 배경과 역사적 변천 과정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평가와 의의]

벽송정의 창건과 중수 등에 대해서는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1832년]에 수록된『고령현읍지(高靈縣邑誌)』의 누정조에 소개되어 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현 서쪽 20리의 용담(龍潭)[현 안림천] 상류에 있다. 수목이 울창하고 시냇물이 휘감겨 도는데, 그 아래에 읍선대(揖仙臺)와 고운정(孤雲亭)이 있는데, 최고운(崔孤雲)[최치원(崔致遠)]이 노닐던 곳이다. 일찍이 고로(古老)들이 서로 전하기를 ‘정자[벽송정]는 한(漢) 오봉(五鳳) 원년(元年)[B.C 57]에 창건했고, 고운이 상량문을 지었는데, 지금은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고운이 가야산에 들어갈 때 지은 시에 ‘해 저물녁 돌아가다 벽송정 아래에 누우니, 한줄기 가야산이 푸르게 보이네[모년귀와송정하(暮年歸臥松亭下) 일말가야망리청( 一抹伽倻望裏靑)]’라고 하였다.”

우선, 읍지 자료를 통해 용담[안림천]상류 지역에 벽송정을 비롯하여 읍선대와 고운정 등 최치원과 관련된 유적이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읍선대는 경관이 좋은 자연 암면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벽송정과 고운정은 최치원과 관련된 정자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재는 고운정을 없어져 전하지 않고, 읍선대는 어디인지 알 수 없다. 혹시 읍선대는 벽송정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쌍림면 산주리의 안림천변에 위치한 ‘미륵불바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런데 19세기에 쓰여진 읍지 자료에서 벽송정이 ‘오봉 원년’에 창건했고, 최치원이 상량문을 지었다고 창건과 중수 시기를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벽송정이 기원전 57년에 창건되었다는 사실은 실제로 믿을 수 없는 내용이다. 참고로 ‘오봉 원년’은 『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첫머리에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가 즉위한 해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와 관련시켜 벽송정의 역사가 유구하였음을 내세우기 위해 제시된 연도가 ‘오봉 원년’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실제 벽송정의 창건 시기는 최치원이 상량문을 지었다는 사실과 그가 남긴 시문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최치원의 『 고운집』에는 ‘碧松亭’이라는 제하에 읍지에서 소개한 시문이 실려 있다. 최치원은 894년(진성여왕 8) 10여 조의 시무책(時務策)을 제시하자 왕이 최치원을 가납(嘉納)하고 6두품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阿飡)으로 임명하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실제로 최치원의 시무책은 실현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관직에서 물러나 여러 곳을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말년을 보냈다. 최치원이 해인사로 은거한 시기는 900년을 전후한 시기가 아닌가 한다.

따라서 『고운집』에 실린 시는 최치원이 말년에 해인사에 있을 때 벽송정을 지나다가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는 저녁 늦게 벽송정 아래에 누워 멀리 가야산을 바라보면서 느낀 감회를 읊은 것이다. 이 시에 표현된 ‘모년(暮年)’은 해인사에 은거한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나타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가야산의 푸른 정취는 일말의 희망이 표현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진성여왕, 효공왕 대를 거치면서 쇠락해져 가는 신라와 자신의 불우한 처지가 서로 비슷하였겠지만, 최치원은 그래도 자신과 신라가 다시 일어 설 수 있을 것이란 희망도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읍지에서 최치원이 중수 상량문을 지었다는 사실은 『고운집』에서 확인할 수 없다.

이처럼 최치원의 「벽송정」 시를 통해 벽송정이 최소한 10세기를 전후한 시기에는 이미 건립되어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 후 벽송정은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시인, 묵객들이 최치원과 관련된 유적을 찾아 시를 읊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무오사화 때 희생되었던 일두 정여창과 한훤당 김굉필 등이며, 이들의 제영시가 현재에도 벽송정에 걸려 있다.

특히, 앞에서 본 『벽송정유계안』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16세기 전반 고령 지역의 재지사족들이 중심이 되어 벽송정 유계(儒契)가 조직되면서 벽송정이 고령의 대표적인 누정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 이 유계에서 벽송정의 유래를 오봉 원년으로 소급해서 정리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즉, 『고령협읍지』[1832년 경]에서 인용한 ‘고로(古老)들이 서로 전하는 말’이 벽송정유계 소속의 계원들이 아니었을까 여겨지기도 한다.

실제 『벽송정유계안』의 제8책인「벽송정유계」(庚寅 十一月 日, 1890년)의 서문[完山 李敦夏 書, 1891]을 보면, 벽송정이 한나라 오봉 초에 창건되었으며, 최치원·김굉필·정여창 등이 이곳에서 시를 읊었다는 사실을 기록해 두고 있다. 비록 이 서문은 읍지보다 늦게 작성된 것이다. 하지만, 벽송정유계의 구성원들은 벽송정이 오봉 초년에 창건되었음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벽송정은 오봉 원년에 창건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10세기를 전후한 시기에는 이미 건립되어 있었다. 최치원의 중수 상량문 운운한 읍지의 내용을 통해 혹시 이 정자가 최치원에 의해 창건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사실은 벽송정이 고령 지역에서는 가장 오랜 역사적 연원을 가진 정자였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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