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5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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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星山面事務所內碑石群 |
영어의미역 | Memorial Monuments in Seongsan-myeon Offic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어곡리 228-3[성산로 897] |
시대 | 조선/조선,근대/근대 |
집필자 | 김용만 |
성격 | 비석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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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지붕돌|귀접이형 |
건립시기/일시 | 조선 후기|일제강점기 |
관련인물 | 정기선|□봉주|한덕필|윤상태|김학제|문성봉 |
재질 | 화강암 |
높이 | 142㎝[현감한후덕필청덕선정비]|65㎝[관찰사정상국휘기선영세불망비]|105㎝[유학문성봉시혜불망비]|98㎝[정삼품전군수윤상태시혜비]|75㎝[김천찰방김후학제청덕비]|130㎝[□□□후휘봉주영세불망비] |
너비 | 50㎝[현감한후덕필청덕선정비]|139㎝[관찰사정상국휘기선영세불망비]|36㎝[유학문성봉시혜불망비]|37㎝[정삼품전군수윤상태시혜비]|42㎝[김천찰방김후학제청덕비]|47㎝[□□□후휘봉주영세불망비]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어곡리 228-3[성산로 897] |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어곡리에 있는 조선 후기 및 일제강점기 비석군.
[개설]
『고령군의 비』, 『향토사료집』, 『문화유적분포지도』 등 자료에는 4기의 비석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이후 성산면 박곡리 장터고개 방앗간 뒤에 있던 2기[관찰사정상국휘기선영세불망비, □□□후휘봉주영세불망비]가 이곳으로 옮겨와 지금은 6기의 비석이 일렬로 서 있다.
[건립경위]
현감 한후덕필 청덕 선정비(県監韓侯徳弼清徳善政碑)는 1799년 성주목 소야현내(所也縣内)에 건립되었다. 관찰사 정상국 휘기선 영세불망비(観察使鄭相國諱基善永世不忘碑)는 1832년(순조 32) 4월 손사도(孫思道)가 중심이 되어 무계역(茂渓驛)에 세웠다. 관찰사 정기선[1784~1839]은 1827~1829년에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유학 문성봉 시혜불망비(儒学文成鳳施恵不忘碑)는 1915년 6월 고령군 성산면민이 세웠다.
정삼품 전군수 윤상태 시혜비(正三品前郡守尹相泰施恵碑)는 1914년 3월 고령군 소야 가현면(所也 加縣面)에서 세웠다. 김천찰방 김후학제 청덕비(金泉察訪金侯学濟清徳碑)는 1873년(고종 10) 6월 무계역에 건립한 것이다. □□□후휘봉주영세불망비(□□□侯諱鳳周永世不忘碑)는 1832년(순조 32) 4월 손사도가 중심이 되어 무계역에 세웠다.
[위치]
대가야읍에서 대구 방향으로 성산IC 직전, 성산면 어곡리 성산면사무소 건물 좌측에 있다.
[형태]
현감 한후덕필 청덕 선정비는 반월형 지붕돌에 전체적으로 화려한 꽃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농대 비신 이수로 구성되어 있다. 이수는 높이 38㎝, 너비 60㎝, 두께 30㎝로 반월형 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비신은 높이 142㎝, 너비 50㎝, 두께 11㎝이고 농대는 너비 55㎝, 두께 44㎝ 정도이다.
관찰사 정상국 휘기선 영세불망비는 귀부와 이수를 갖춘 비로 비신은 높이 139㎝, 너비 65㎝, 두께 15㎝이고, 이수는 높이 45㎝, 너비 77㎝, 두께 32㎝이다. 유학 문성봉 시혜불망비는 지붕돌을 갖추었으며, 비신은 높이 105㎝, 너비 36㎝, 두께 10㎝이고, 지붕돌은 높이 26㎝, 너비 63㎝, 두께 43㎝이며, 농대는 너비 63㎝, 두께 39㎝ 정도이다.
정삼품 전군수 윤상태 시혜비는 지붕돌이 있으나 뒷부분은 일부 탈락되었다. 높이 98㎝, 너비 37㎝, 두께 10㎝이고 지붕돌은 높이 37㎝, 너비 56㎝, 두께 42㎝이며, 농대는 너비 60㎝, 두께 40㎝ 정도이다. 김천찰방 김후학제 청덕비는 귀접이형으로 비신은 높이 75㎝, 너비 42㎝, 두께 22㎝이다.
□□□후 휘봉주 영세불망비는 비석 최상단 중앙에 귀솟음한 봉이 있고 비신과 한 돌로 된 지붕돌 형태의 장방형 장식 부분이 있다. 관찰사 정상국 휘기선 영세불망비와 같은 시기에 세웠으며, 비신은 높이 130㎝, 너비 47㎝, 두께 12㎝이고, 지붕돌은 높이 29㎝, 너비 59㎝이다.
[금석문]
현감 한후덕필 청덕 선정비는 정면 중앙에 세로로 ‘현감 한후덕필 청덕 선정비(県監韓侯徳弼清徳善政碑)’라고 대자(大字)로 새기고, 그 우측과 좌측에 소자(小字)로 된 영세불망의 구체적 내용이 있는데, ‘빙옥기인이재리방청덕소이만세파미(氷玉其人二載莅邦清徳素履万世播美)’라 새겼다.
관찰사 정상국 휘기선 영세불망비는 정면 중앙에 세로로 ‘관찰사 정상국 휘기선 영세불망비(観察使鄭相國諱基善永世不忘碑)’라고 대자로 새기고, 그 우측과 좌측에 소자로 된 영세불망의 구체적 내용이 있다. ‘덕시지보여송소동광혜불비전우사속앙지첨유비약병몽고산대택공리지[부](徳施之普輿頌所同広恵不費伝郵斯速仰止襜帷庇若帲幪高山大沢功利之愽)’라 새기고, 건립과 관련해서는 ‘임진사월일무계역립(壬辰四月日茂渓駅 立)’이라 했다.
유학 문성봉 시혜불망비는 정면 중앙에 세로로 ‘유학 문성봉 시혜불망비(儒学文成鳳施恵不忘碑)’라고 대자로 새기고, 그 우측과 좌측에 소자로 된 영세불망의 구체적 내용이 있다. ‘천이고자혹알불시택지재하군물내자갈기택상장운장우금석가휴☐아명폐부(川而高者或閼不施沢之在下群物乃滋曷其沢上将雲将雨金石可虧☐我銘肺腑)’라 하였다.
정삼품 전군수 윤상태 시혜비는 정면 중앙에 세로로 ‘정삼품 전군수 윤상태 시혜비(正三品前郡守尹相泰施恵碑)’라고 대자로 새기고, 그 우측과 좌측에 소자로 된 영세불망의 구체적 내용이 있다. ‘이선시신이은급인박강무맥여기재둔출금물인구재휼빈감복기덕용전사민(以善禔身以恩及人雹降無麦如己在屯出金勿吝救灾恤貧感服其徳庸鐫斯珉)’이라 하였다. 즉 눈이 내려 다된 보리농사를 망치니 많은 돈을 내어 지방민을 살려내고, 가난에서 구한 군수의 은덕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다.
김천찰방김후학제청덕비는 정면 중앙에 세로로 ‘김천찰방김후학제청덕비(金泉察訪金侯学済清徳碑)’라고 대자로 새기고, 그 우측과 좌측에 소자로 된 영세불망의 구체적 내용이 있다. ‘소야두야부견순량육봉이진□[점]마사□지심본청시민여상어호후□산치영장(召耶杜耶復見淳良堉俸以賑□[点]馬斯□指心本清視民如傷於乎侯□山峙永長)’이라 새기고, 건립과 관련해서는 ‘임진사월일무계역립(壬辰四月日茂渓駅立)’이라 했다.
□□□후 휘봉주 영세불망비는 정면 중앙에 세로로 ‘□□□후 휘봉주 영세불망비(□□□侯諱鳳周永世不忘碑)’라고 대자로 새기고, 그 우측과 좌측에 소자로 된 영세불망의 구체적 내용이 있다. ‘□향밀이포정방류공불부승합관리두(□郷密迩蒲政旁流公不負丞盍観螭頭)’라 새기고, 건립과 관련해서는 ‘임진사월일무계역립(壬辰四月日茂渓駅立)’이라 했다. 영세불망비의 주인공은 무계역과 관련된 관직을 가졌던 인물로 보이며, 선정을 베풀었던 관계로 이 비석이 세워진 것 같다.
[현황]
현재 6기의 비석이 면사무소 건물 좌측 경내에 나란히 서 있어서 경관상 어울리며, 보존에도 문제가 없다. 다만 일부 비석이 뒤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받쳐 두었는데, 도괴되거나 더 이상의 훼손을 막기 위해서는 빠른 시일 내에 수리하여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가능하면 비석 뒤편으로 낮은 담장을 축조하고 보호책을 마련하여 장기적인 관리를 도모함이 필요할 것 같다. 다행인 것은 관찰사정상국휘기선영세불망비의 경우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분리되어 있던 귀부와 이수를 제대로 맞춰 격을 갖춘 것이다. 나머지 비석들도 기단석을 잘 맞추어 바로 세워 두었다.
[의의와 평가]
6기의 비석은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 초기에 세워진 것이다. 조선시대 비석 중 3기는 무계역이 중심이 되어 건립하였고, 나머지 1기는 소야현에서 건립하였다. 일제강점기의 비석 2기는 각각 소야 가현면과 성산면이 중심이 되었다. 이는 시대 변화에 따른 행정구역 개편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에는 역이 행정단위로서 기능을 가졌고 따라서 비석 건립의 주체적 역할을 하였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역이나 현의 체제가 개편되면서 면이 비석 건립의 주체로 나타나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