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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군 소작쟁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399
한자 高靈郡小作爭議
영어의미역 Tenant Struggles in Goryeong-gu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쌍동면|개진면|운수면|덕곡면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소작쟁의|농민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31년 9월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상북도 고령군 쌍동면|개진면|운수면|덕곡면
관련인물/단체 전병택

[정의]

일제강점기 고령 지역에서 일어난 소작쟁의.

[역사적 배경]

1910년대 일제에 의해 추진된 토지 조사 사업은 식민지 지주제를 구축하였다. 1920년대 일제는 산미 증식 계획을 시행하면서 식민지 지주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식민지 농업 정책의 결과 지주의 토지는 증가하였으나, 자작농이 대거 몰락하여 자소작농 또는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게다가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 초반까지의 세계 대공황은 농촌 경제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1930년대 초반 고령 지역도 전국적인 현상과 마찬가지로 작황이 심각하게 흉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작료는 작황을 반영하지 않은 채 오히려 증가하였고, 지주가 부담해야 할 지세마저 지주를 대신해 소작농이 부담해야 하였다. 이에 1931년 11월 고령군의 『동아일보』 지국 기자가 지주의 반성을 촉구하는 글을 기고할 정도였다.

[목적]

고령군 소작쟁의는 일제강점기 고령 지역의 소작인들이 식민지 지주제의 농업 경영 아래에서 농가 경제가 피폐되어 경제생활에 큰 타격을 입자, 소작료 인하와 지세의 지주 부담, 소작권 이동 반대 등을 요구하면서 자신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전개한 농민 운동이었다.

[경과]

일제강점기 농민 운동은 1920년대에 이미 소작인 조합에서 농민 조합으로 조직이 발전하였고, 각 군을 단위로 농민 조합이 조직되어 소작인을 비롯한 농민의 계급적 이익을 옹호하면서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고령 지역의 경우 청년 운동과 달리 농민 운동은 지도 기관이 결성되지 못하였다.

1930년대 초 세계 대공황에 따른 곡가 폭락이 조선 농촌의 붕괴를 가져왔고, 때마침 발생한 대흉작으로 고령 지역의 농민들은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소작인 조합을 결성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와 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대신 소작인 대회를 열어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관철시켜 나가고 있었다.

먼저, 고령군 쌍동면에서 1931년 9월 제2차 소작인 대회를 열고 소작인 대표자로 전병택(全炳宅) 등 20여 명을 정한 후 첫째 지세는 지주가 전부 부담할 것, 둘째 소작료는 5할로 정할 것, 셋째 소작권은 작인의 과실이 없을 때는 절대 이작하지 못할 것, 넷째 작년의 두세[말세]는 모두 폐기할 것 등을 결의하고 투쟁에 나섰다.

다음으로 1931년 12월 고령군 개진면 신안리의 소작농들은 대구에 사는 부재지주 장직상(張稷相)의 소작료 징수에 대항하여 벼를 베지 않는 입도(立稻) 투쟁을 벌였다. 또 1932년 지주 장직상이 고령군 운수면의 소작농에게 8할 이상의 소작료를 내게 하자 소작농들은 작료 불납으로 대항하였다. 그다음으로 고령군 우곡면에서도 지주가 지세를 부담해야 한다며 지주에 대항하여 불경동맹(不耕同盟)으로 맞섰다.

1935년에는 고령 지역에 수해가 발생해 작황이 좋지 않았으나, 지주의 소작료 징수는 변화가 없었다. 이에 고령군 덕곡면에서 소작농들이 고율의 소작료에 불응하자 지주는 소작권 이동으로 맞섰고, 소작농은 다시 불경동맹 등을 결성해 지주에게 대항하였다. 이러한 소작쟁의는 1935년 4월 쟁의 조정 건수가 200~300건에 달할 정도로 빈번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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