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3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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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八山家 |
영어음역 | Palsanga |
영어의미역 | Pasan Famil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호동 |
[정의]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고령의 도공 팔산(八山)이 이룩한 일본 도자기 문화의 일맥.
[개설]
오늘날 일본 학자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도자기전쟁이라고 말한다. 이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조선 강토 방방곡곡에서 무차별로 끌고 간 수많은 조선 도공들을 일본의 사쓰마[薩摩]와 아리타[有田]·가라쓰[唐津]·아가노[上野]·다카도리[高取]·하기[萩]·야쓰시로[八代]·소다이[小代] 등 규슈[九州]의 여러 곳에 집중 분산시킨 뒤, 당시 일본 사회가 그토록 갈망했던 접시와 대접·병·항아리 등의 일상생활 용품과 상류층에서 보물로 취급했던 다완(茶碗)을 다량으로 생산케 하여 그들의 식생활과 차 생활에 대혁신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규수로 붙잡혀 간 고령의 도공들]
1598년의 정유재란 중에 일본군은 조선의 도공 400여 명을 포로로 잡아 일본으로 끌고 갔다. 그들 가운데는 1592년 6월 초 고령의 무계전투를 전후한 시기 고령 지역에서 잡아 간 도공 7~8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이 성주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할 때 포로로 잡혀 가덕도에 끌려 가 감금되었다가 일본으로 끌려가게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령군 성산면의 낙동강 변에 있는 도진나루는 임진왜란 때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간 생이별의 현장이다. 『성산가계보(星山家系譜)』·『살마명승지(薩摩名勝志)』 등에는 1595년(선조 28)에, 『유장(留帳)』·『조선소도유래기(朝鮮召渡由來記)』 등에는 1598년(선조 31)에 일본으로 끌려 간 기록이 확인된다. 이중 팔산은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 일본 다카도리야끼[高取燒]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도자기는 막부의 극찬을 받았는데,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것도 있다.
[변천 및 현황]
고령군 운수면 팔산에서 도자기를 만들던 팔산은 1600년(선조 33) 일본으로 끌려간 뒤 치쿠젠국[筑前國] 쿠라테군[鞍手郡] 다카도리산[鷹取山][또는 高取山] 서록에 있는 영만사(永滿寺)에서 도자기를 빚기 시작하였다. 당시 구로다는 팔산을 다카도리 하치조[高取八藏]라 부르게 했다. 팔산이 다입(茶入)[찻잎 보관용 항아리]을 바쳤을 때 도쿠가와[德川] 막부는 격찬을 아끼지 않으며, 350석의 식록과 관작까지 내려 주는 등 특별한 대우를 하였다.
1614년(광해군 6)에 쿠라테군 우찌이소[內磯]로 옮겨 생활하던 팔산은 1624년(인조 1) 귀국을 간청하다 야마다시[山田市] 가라후토고쿠[唐人谷]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민간용 도자기를 만들었다. 구로다 번주는 1630년(인조 8) 팔산을 다시 불러 번주 전용 도자기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일본 다도의 대가 고보리엔슈[小堀掘遠州]로부터 다도를 지도받았는데, 이후 그가 만든 제품은 일약 ‘엔슈다카도리[遠州高取]’라 하여 높이 평가되면서 다카도리야키라 통칭하게 되었다. 처음 개요지가 다카도리산이어서 ‘다카도리야키’라고 했는데, 다카의 ‘응(鷹)’ 자를 ‘고(高)’ 자로 바꾼 것은 팔산이 고려인이라 하여 붙이게 된 것이다. 당시 팔산이 만든 제품은 다완(茶碗) 1개가 백미 1만 석에 해당할 만큼 고가품으로 취급되었다고 전한다.
[팔산가의 가업 계승]
1654년(효종 5) 팔산이 죽자 아들 정명(貞明)이 부업을 계승하여 1665년 후쿠오까현 아사쿠라군[朝倉郡] 고이시하라고[小石原鼓]로 요장을 옮겼다. 이후 팔산가 3세인 하치조우[八之承]는 다시 신사라야마[新皿山]에서 요장을 연 이래 1867년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질 때까지 202년간 구로다번요[黑田藩窯]를 지속하였다. 팔산가는 1867년 번(藩)의 제도가 사라졌을 때 도자기 생산을 잠시 중단하기도 했으나, 현재 한 번에 3천 개씩 1년에 여섯 번 도자기를 생산하고 있으며, 미국 등 세계 시장에 수출하고 있다.
[고령을 찾은 팔산가의 후손]
1987년에 사망한 다카도리 세이잔[高取靜山]은 생전에 선조의 고향을 찾는 일이 소원이었다. 그녀는 1976년 장남인 미치오[道雄]와 함께 고령군 운수면 팔산리를 찾았다. 그때 팔산리에서 선조의 요지를 발견하고 백자와 청자 등의 파편을 찾아내 그 빛깔이 팔산이 규슈에서 만든 백자, 청자의 빛깔과 동일한 것을 확인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