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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362
한자 星山家
영어음역 Seongsanga
영어의미역 Seongsan Famil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호동

[정의]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고령의 도공 김해김씨가 이룩한 일본 도자기 문화의 일맥.

[개설]

오늘날 일본 학자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도자기전쟁이라고 말한다. 이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조선 강토 방방곡곡에서 무차별로 끌고 간 수많은 도공들을 일본의 사쓰마[薩摩]와 아리타[有田]·가라쓰[唐津]·아가노[上野]·다카도리[高取]·하기[萩]·야쓰시로[八代]·소다이[小代] 등 규슈[九州]의 여러 곳에 집중 분산시킨 뒤, 당시 일본 사회가 그토록 갈망했던 접시와 대접·병·항아리 등의 일상생활 용품과 상류층에서 보물로 취급했던 다완(茶碗)을 다량으로 생산케 하여 그들의 식생활과 차 생활에 대혁신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규수로 붙잡혀 간 고령의 도공들]

1598년의 정유재란 중에 일본군은 조선의 도공 400여 명을 포로로 잡아 일본으로 끌고 갔다. 그들 가운데는 1592년 6월 초 고령의 무계전투를 전후한 시기 고령 지역에서 잡아 간 도공 7~8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이 성주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할 때 포로로 잡혀 가덕도에 끌려 가 감금되었다가 일본으로 끌려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령군 성산면낙동강 변에 있는 도진나루는 임진왜란 때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간 생이별의 현장이다. 『성산가계보(星山家系譜)』·『살마명승지(薩摩名勝志)』 등에는 1595년(선조 28)에, 『유장(留帳)』·『조선소도유래기(朝鮮召渡由來記)』 등에는 1598년(선조 31)에 일본으로 끌려 간 기록이 확인된다. 이중 김해김씨는 이름은 알 수 없지만 고령의 성산(星山)에서 끌려 왔다고 하여 일본 성을 호시야마[星山]라고 하였고, 사쓰마도자기의 시조가 되었다.

[성산가의 사쓰마야키]

사쓰마는 일본 규슈 지방 남부 가고시마 현 일대의 옛 이름이며, 사쓰마야키[薩摩燒]는 사쓰마 산의 도자기라는 뜻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이찌기[市來]에 상륙한 도공은 신(申), 김(金), 노(盧) 3성의 남녀 10명으로, 그 가운데는 고령 지역 성산 사부(紗鳧) 요지에서 끌려간 김해김씨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성산에서 끌려 왔다고 하여 일본 성을 호시야마라고 하였다. 당시 이곳의 번주[지방 영주]인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그에게 츄우지[仲次]라는 이름을 내리고 요지를 축조하게 함으로써 사쓰마야키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였다.

도자기를 생산하는 요지군은 당초 지방 영주인 번주의 전용 요장이었기 때문에 번주의 거처가 이전할 때마다 요장도 함께 이동했는데, 시마즈는 명도공인 김해김씨를 주취(主取)라고 하여 책임자로 삼아 도자기를 만들게 했다. 또한 다른 지방의 번에 파견하여 새로운 도자기 제조 기술과 유약 종류의 변화 등 기법을 도입함으로써 사쓰마야키는 일본 전국에서도 독특한 요업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김해김씨, 즉 성산가를 중심으로 시작된 사쓰마야키의 고요지(古窯地)는 50여 개소나 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다데뇨[堅野] 계 도요이다. 현재 성산가의 후손들은 가고시마의 미야마(美山)에서 선조들의 기술을 계승하고 있다.

[의의와 과제]

성산가와 마찬가지로 고령에서 끌려간 도공의 후예로서 일본에서 크게 활약한 가문으로 팔산가가 있다. 1976년에는 팔산가의 11대 후손인 다카도리 세이잔[高取靜山]이 고령군 운수면 팔산리를 방문하였고, 이후 팔산가와 더불어 고령 지역에 세거했던 김해김씨 가의 가계가 밝혀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지금은 이름조차 잊혀진 적잖은 수의 도공들의 존재를 기억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하였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더라도, 현재 일본의 도자 문화 전통의 한 축이 고령 지역에 기반하고 있음을 정리하여 일본과 한국 전통 자기의 연원을 밝히는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문화 교류의 장을 열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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