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3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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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加耶 |
영어음역 | Daegaya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가야 |
집필자 | 이형기 |
[정의]
삼국시대 고령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해 나간 후기 가야국.
[개설]
대가야의 기원은 후한 시기 고령 지역에서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되어 서서히 성장해 나간 반로국(半路國)이다. 반로국은 3세기 후반경 내재적인 발전 과정 속에서 현재의 고령군 우곡면 일대인 신복현과 합천 야로 지역인 적화현을 통합하면서 지역 연맹체를 구성하였다. 지역 연맹체 단계에 이르렀을 무렵 대가야의 모습은 대가야읍 내 쾌빈리 고분군을 통해 볼 수 있는데, 쾌빈리 1호 목곽묘에서 확인되는 유물들이 지산동 35호분 단계의 것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대가야의 발전 양상을 추적할 수 있다.
[건국 설화]
『동국여지승람』「고령현」조에는 대가야 시조신화가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에게 감응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金官國王)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 이 설화는 『삼국유사』「가락국기」조에 수록된 수로왕 신화보다 늦은 시기에 성립된 것이고, 가야산신 정견모주의 존재로 보아 대가야의 주체가 토착적 성격이 짙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수로와의 형제 관계가 나타나 있으므로, 고령 지방의 토착 집단이 세력 성장으로 보아 대가야의 정통임을 표방하며, 김해 방면의 집단을 대신하여 가야 연맹의 주도적 존재로 대두되는 것을 반영한 설화이다.
[발전 양상]
대가야는 400년 고구려군의 남정 이후 급격한 사회 발전을 이루게 되었고, 내부적으로는 5세기 중엽부터 부 체제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한 모습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 고령 지산동 고분군이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 중 가장 먼저 축조된 것으로 여겨지는 지산동 35호분 단계까지만 하더라도 이전 단계인 토기 전통이 계승되고 있어, 앞 시기 문화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그렇지만 지산동 30호분에서는 그와는 달리 금동관을 착장한 자까지 순장 시킬 수 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주석실 개석과 하부 석곽의 개석에서 암각화가 발견된다는 사실은 기왕의 신앙 체계가 필요하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기왕의 신앙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신분의 존재는 신성한 이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게 하며, 이는 곧 초월적인 신분, 즉 ‘왕’이 등장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곧 새로운 단계로의 질적인 변화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대가야 지역 연맹체는 지산동 30호분이 축조되는 시기인 5세기 4분의 2분기에서 479년 어느 시기에인가 부 체제 단계에 접어들었으며, 이때부터 ‘대가야’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전 원동력]
대가야의 발전 원동력은 철제 무기로 무장된 군사력을 기반으로 마련한 강력한 정치 체제와 철을 바탕으로 한 교역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더불어 지리적 위치상 고구려군의 남정으로 인한 전화를 전혀 입지 않아 기왕에 4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내재적인 발전이 지속될 수 있었다. 또한 4세기 후반 들어 진행된 백제와의 교류로 선진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성장에 가속도가 붙었을 것이다. 발전한 대가야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인 479년 남제로의 사신 파견 역시 백제와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여겨진다. 이는 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에서 대가야 계통의 유물들이 발견되는 사실로도 확인된다.
여기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야로 지역의 철광이다. 철기의 제작은 단단한 철제농기구의 사용으로 좀 더 나은 농업 생산력을 이끌어 냄과 동시에 무구류의 제작으로 말미암은 강력한 군사력 확보를 가능하게 해 준다. 이러한 철기를 바탕으로 대가야는 서서히 외부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결국 경상남도 서부 일대를 영향권 내에 둘 수 있었다.
결국 대가야의 발전에 선진 유민이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볼 수는 있지만, 4세기 초부터 보이는 고령 지역에서의 내재적인 발전이 선행되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건국 신화에서도 기존 고령 지역 내에서의 토착 세력이 중심이 되어 일부 선진 문물을 가진 이주 집단 수용 과정에서 대가야의 발전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분제로 보는 대가야 사회]
대가야의 신분제는 지산동 44호분에서의 순장 양상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순장 묘제로 알려진 이 고분의 순장 양상은 기왕의 순장에 대해서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주석실을 포함하여 부장품을 넣었던 남쪽과 서쪽 석실에서도 주피장자 이외의 인골이 발견되었다. 그 외에 32기의 순장 석곽 중 22기의 석곽에서 순장자가 발견되었다.
순장자들은 대개 자기의 묘곽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대가야만의 독특한 순장 방식이다. 이들은 각기 다른 성격의 부장품을 소유하고 있었다. 지산동 44호분의 주인공 머리맡이나 발치에 순장된 사람은 금제 이식이나 유리구슬 목걸이 등 장신구를 가지고 있고, 그 밖에 순장 곽을 따라 대도나 화살촉을 가진 사람, 철검이나 도끼 등의 농기구를 가진 사람, 방추차를 가진 사람, 등자나 재갈 등 마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 등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수장인의 연령과 성별도 달라서 7~8세 가량의 여자아이에서부터 20대의 젊은 남녀, 30대의 여성, 40대 이상의 장년 남자 등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사실로서 순장자들은 시녀나 시종이 많은 경우를 차지하고 있으나 다른 신분도 있었다. 즉, 농기구를 가진 이는 당시 생산을 담당하던 계층이었지만 노동 노예는 아니었을 것이며, 무구류나 마구류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주인공을 시종하거나 호위하던 상당한 신분을 소유한 무사로 추정된다. 즉, 순장이라고 하는 매장 행위가 계세사상(繼世思想)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때, 당시 대가야 최고 지배 계급의 분묘였던 지산동 44호분에는 주인공의 생시의 모습을 그대로 축소하려는 노력을 했을 터이고, 이에 따라 당시 다양한 사회 및 신분이 순장이라는 형태로 그대로 무덤 속에 녹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멸망 원인]
가야는 여러 정치 세력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멸망 과정도 각기 달랐다. 금관가야처럼 신라에 투항하는 경우도 있었고,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그 멸망 과정을 전혀 확인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대가야의 경우는 신라에 의해 멸망당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 그 이후의 모습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강원도 동해시의 추암동 고분군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다.
6세기 중엽 대가야는 다른 가야 세력과는 달리 끝까지 신라에 저항하였다. 이러한 저항은 결국 신라인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는 인식을 주게 되고, 기왕의 신라인들이 반란 세력들에게 가하는 사민(徙民)을 당하게 되었다. 이는 동해시 추암동의 ‘가’지구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다양한 대가야 계통의 토기들로서 살펴볼 수 있다. 특히 형태는 대가야 계통의 것이지만 현지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개배의 존재는 이러한 추정을 더욱 가능하게 한다. 대가야는 오랫동안 고령을 중심으로 성장하였지만 결국 신라에 의해 멸망당하고, 신라에 저항한 지배층들은 고령 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추암동 지역까지 사민 당하였음을 출토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대가야는 고령 지역을 중심으로 서서히 발전을 하다가 5세기 이후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6세기 중엽 신라에 의해 멸망을 당하였다. 대가야의 멸망은 곧 가야 사회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는 의미를 지닌다. 대가야가 멸망한 원인으로는 대가야가 영향권 내의 국가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대가야가 가지고 있는 지리적인 폐쇄성 및 철에서 금·은으로라는 교역 물품의 변화 추세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여 교역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함으로써 국제 사회에서의 위상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한 점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