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C01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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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홍산리 내촌마을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배해수 |
[옛 이름을 간직하고 사는 곳]
내촌마을은 여느 동네처럼 집들이 한곳에 모여 있지 않고 흩어져 자리를 잡고 있다. 그래서인지 마을 곳곳을 부르는 이름들이 있다. 듣기만 해도 정다운 ‘큰뜸’, ‘구석뜸’, ‘너머뜸’, ‘재너머’ 등이 그것들로, 오랜 옛날부터 부르던 이름 그대로이다.
김분순[1933년생] 할머니는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지명 때문에 당황스러웠던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 주었다. 집안 어른이 새색시였던 김분순 할머니께 재너머에 사는 마을 어른을 모셔 오라고 했던 것이다. 할머니는 그 말을 듣고 더럭 겁이 났었다고 했다. 재 너머로 가야 한다기에 멀리 산길을 넘어가야 하는 줄 알아들은 것이다. 그런데 실제 재너머라는 곳은 같은 동네에 있는 그냥 나지막한 언덕 너머여서 안도의 한숨과 함께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고 한다.
그만큼 내촌마을은 산이 없는 평야 지대로, 조금만 솟아오른 언덕도 각기 재미있는 우리말 이름들이 있다. 지명으로만 보아서는 산이라는 생각이 드는 매봉재와 홍지뫼를 비롯하여 말뫼동산, 소매동산, 굴잔등, 청룡날과 인근 옥성리 내재의 삿갓재·양산날 등 언뜻 듣기만 하면 산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름들인데, 실제로 가 보면 높지 않은 작은 언덕에 불과하다.
산골에 사는 사람들이 이 동네를 처음 와 보면, 이 마을 사람들의 과장된 지명 붙이기에 다소 어리둥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각자의 지명에는 나름대로 의미가 숨어 있다. 그중에서도 굴잔등은 동학농민운동군이 굴을 파고 피신했던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너른 들판이 펼쳐진 곳이어서 해학이 넘치는 이름붙이기에 옛 어른들의 재치가 느껴지기도 한다.
[‘뜸’이란 말이 뭐지요?]
우리 옛말에는 ‘뜸’이라는 재미있고 정겨운 표현이 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시간의 경과, 즉 시차를 의미하는 뜸이라는 뜻이 나온다. 여기에서 뜸은 어떤 일을 하는 동안 잠시 쉬거나 그 일을 만만히 하기 위하여 서둘지 않고 한동안 가만히 있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용례로는 동네 어귀부터 마을 구석까지 연결하는 길에 붙어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을 말할 때도 뜸이라고 했다. 즉, 한동네에서 따로따로 몇 집씩 한 군데 모여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는 집들을 말한다.
뜸의 유래가 궁금하여 이 마을 몇몇 주민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물어 봤으나, 그저 “예전부터 다들 그렇게 부른다.”는 싱거운 답만 들었다. 그런데 마을 어른 중에서도 연세가 많은 이두영[1931년생] 할아버지께 새로운 답을 들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거기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는 이야기지.”라고 말했다.
이두영 할아버지의 말처럼 뜸이란 어딘가로 ‘깃들었다’는 표현으로, ‘어디쯤’의 장소를 의미하는 데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국어학자 김규남에 의하면 뜸은 장소를 뜻하며, 이 마을 주민들이 부르고 있는 지명인 ‘웃[웃몰·웃멀]’은 마을이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이 마을의 옛 지명들에 붙어 있는 뜸은 약간 비탈진 외곽에 자리한 작은 규모의 가옥들을 뜻하며, 이런 경우가 내촌마을에 가장 잘 들어맞게 적용되고 있다. 내촌마을은 지형적으로 작은 언덕들이 빙 둘러서 옹기종기 마을을 감싸 안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구불구불 마을길의 내력]
과거의 내촌마을은 지금처럼 경지 정리가 반듯하게 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농로가 직선이 아닌 곡선이었고, 가옥들이 논과 인접한 곳에 분산되어 자리를 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군데군데 가옥들이 들어서다 보니 마을길 역시 구부러질 수밖에 없었다.
가로등이 없던 시절에는 어두운 밤이면 막걸리를 한 잔 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논두렁에 빠지거나, 학교에서 늦게 집으로 오다가 길에 미끄러져 논에 빠진 아이를 꺼내려 소란했던 일들도 많았단다. 이제는 시멘트로 포장도 되고 넓어져서 자동차, 오토바이, 농기계들도 지나다닌다.
[비만 오면 걸어 다니기도 힘들었던 마을길]
마을길이 정비된 것은 30~40여 전의 일인데,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마을길은 비가 오거나 눈이 녹는 날이면 걸어 다니기조차 힘들었다.
내촌마을과 인접한 외리마을 역시도 겨우내 추웠던 날씨가 풀리면 징검다리 삼아 진창을 건너갈 수 있는 돌멩이조차 귀할 만큼 마을길은 온통 진흙투성이로 뒤범벅이 되었다. 꽁꽁 얼었던 땅이 녹기 시작하는 봄철의 마을길은 고무신이 박히면 빼내기조차 힘들었다고 한다.
죽산면 북죽동의 ‘리못안’이라는 곳은 지금도 주민들에게 ‘빼못’ 또는 ‘뻘못’으로 불리고 있다. 지대가 낮아 비만 오면 길이 물에 잠기곤 했다. 길을 오가는 이들이 신을 벗고 버선까지 빼내어야 발목을 붙드는 뻘길을 겨우 건널 수 있었다 해서 그런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어디랄 것도 없이 모두 시멘트로 포장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추억거리 지명이 되었다.
예전의 마을길은 한 번 물이 차면 쉽사리 빠지지도 않아서, 포장이 되기 전까지는 비가 오거나 눈이 녹는 계절에는 왕래를 자제했을 정도였다. 내촌마을 길들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힘을 모은 주민들의 공동 작업으로 좁은 길들이 넓혀졌다.
내촌마을 길들은 다른 산간 지역 마을들보다는 일찍 시멘트 포장을 했는데, 이때도 마을 주민들이 모두 삽을 들고 합심하여 길을 포장했다고 한다. 죽산면의 다른 마을들은 1990년도 초 시멘트 포장길이 생겼고, 좀 큰 길들은 2000년도가 되어서야 아스팔트로 포장이 된 것에 비하면 무척 빠른 편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진창길을 걸어야 했던 이 마을 주민들에게는 그만큼 포장된 길이 절실했었던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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