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15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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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음역 | Gosire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
집필자 | 이윤애 |
[정의]
전라북도 김제에서 산이나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 먼저 조금 떼어 던지면서 외치는 소리.
[개설]
‘고시레’라는 말은 감탄사다. 지방마다 유래가 좀 다르지만 거의 들이나 산에서 음식을 먹기 전에 준비해간 음식 중에서 하얀 밥 같은 것을 던지면서 외치는 소리다. 고시레를 외치면서 음식을 던지는 행위는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풍속 중의 하나다. 이런 행위는 대개 봄철에 모내기를 할 때나 여름철에 김매기를 할 때 주로 행해졌다. 따라서 벼농사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역사]
고시레라는 말은 주로 벼농사를 하는 지역에서 하던 관습적 행위다. 고대 중국의 하왕조 신농씨시대에 대규모 관개 사업을 할 때 ‘고술해’라고 하는 사람이 새로운 농사법을 개발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고시레라는 말은 새로운 농사법을 개발한 고술해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나온 관습으로 볼 수도 있다.
[정신적 의미]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나눔 정신 가운데 추수가 끝난 후 벼이삭을 남겨서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을 삼게 했거나, 까치나 날짐승을 위해서 과일나무에 과일을 몇 개 남겨두는 일 등이 있다. 들에 나갔을 때 ‘고시레’ 하면서 음식을 먼저 나누는 것도 미신적 행위가 아닌 조상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며 은혜에 보답하는 애니미즘적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제 지역 유래]
전라북도 김제 지역에서는 고시레라는 말이 진묵대사(震默大師)[1562~1633년] 어머니 고씨 부인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전해진다. 진묵대사는 전라북도 김제 만경현 불거촌에서 태어난 유명한 승려이다. 7세에 출가하였는데 그 후로 일생 동안 수많은 신비스러운 일을 행하면서 살았다. 대개 출가한 스님들은 가족과 맺었던 인연을 다 끊어버리는 것이 상례였지만, 진묵은 출가한 후에도 늘 어머니와 누이들과 깊은 사랑을 나누면서 살았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힘과 마음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고 생각했고, 누이들과도 피를 맺은 형제로서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진묵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다하였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간절하게 드러냈다. 진묵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들인 자신과 두 누이가 모두 세상을 떠나더라도 길이길이 모든 사람들의 향과 참배를 받을 수 있는 장소라는 의미[무자손천년향화지지(無子孫千年香火之地): 자손 없어도 천 년 동안 향화를 올릴 명당자리란 뜻]의 불거촌에 어머니 묘를 모셨다.
지금도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의 성모암에는 진묵대사와 그의 어머니가 모셔져 있다. 이 성모암에는 진묵대사 어머니의 묘와 묘비가 단아하고 기품 있게 만들어져 있다. 이곳에는 ‘진묵대성사존비지묘(震黙大聖師尊妣之墓)’라는 팻말이 서 있고 전통사찰 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1562년경 조선 명종 때 진묵대사에 의해 봉안된 묘소, 동양의 소석가모니 칭송을 받던 대사는 노모를 이곳 만경현의 북쪽 불거촌(佛居村)에 묘를 봉안하고, 이곳이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천하 명당인 ‘무자손천년향화지지’라 칭하고, 모친 묘에 제사를 지내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줄 것이니 향과 초를 올려 참배하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초의대선사가 지은 『유적고(遺蹟攷)』에서는 “대사는 동양의 소석가이시지만 효를 실천한 민족의 대스승이시다.”라고 칭송하였다. 모친의 성은 ‘제주고씨’이며 훗날 조의씨(調意氏)라고 존칭해 왔다. 민족의 얼이 살아 숨 쉬는 이곳 묘에 경건히 참배하여 효에 대한 숭고한 정신문화를 유지 계승하기 위해 사단법인 진묵대사 유적진흥회에서 사적지 1호로 지정하였고, 진묵대선사가 모친을 위하여 지은 49제 제문이 전한다.
성모암에는 한글로 쓴 편액이 걸린 고시례전이 있고 진묵대사와 그 어머니 영정이 모셔져 있다. 김제 지역에서 들이나 산에서 음식을 먹기 전에 고시레라고 외치면서 음식을 던지는 것은 진묵대사의 어머니 ‘고씨네’ 부인에게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는 행위적 의미가 강하다. 원래 고씨 부인 묘가 논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농부들이 새참을 먹거나 밥을 먹을 때 “고씨네도 드시오.”하고 밥 한술씩을 던져주었다고 한다. ‘고시레’의 ‘고시’는 제주고씨인 진묵대사 어머니의 성씨인 ‘고씨(高氏)’에서, ‘레’는 ‘예도 예(禮)’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근래에는 이곳이 명당 터로 소문이 나서 많은 어머니들이 순례하면서 ‘고씨네’ 부인을 기념하고 있다.
다음은 성모암의 진묵대사가 어머니 돌아가시고 49제 때 올렸던 제문(祭文) 내용이다. “열 달 동안 태중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리까?/어머니 슬하에서 삼 년 동안 길러주신 그 은혜를 이 자식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만세 위에 다시 만세를 더 산다고 하더라도/이 자식의 마음에는 그래도 부족하온데/백 년 생애에 백 년도 다 채우지 못하시고 가셨으니/어머니의 수명은 어찌하여 그리도 짧습니까?/표주박 하나를 손에 들고 길가에서 걸식을 하는 이 산승(山僧)은/이미 말할 것도 없거니와/비녀를 꽂고 규중에 처하여 아직 출가하지 못한 누이동생이 어찌 애처롭지 않습니까?/상단의 불공의식을 마치고 하단 불공의식까지 끝나니/스님들은 제각기 방으로 돌아가고/앞산과 뒷산만 홀로 첩첩한데/어머니의 영령은 이제 어디로 떠나셨습니까?/아! 애달프다 사랑하는 어머니여!”
[그 밖의 유래]
1. 충청도 당진의 고씨네 설: 충청도 당진 땅에 고씨 성을 가진 늙은 홀아비가 살았다. 가난한 살림에 굶기를 밥 먹듯 했는데 흉년이 든 어느 해에 메말라가는 자신의 논에 물을 퍼올리다가 힘에 부쳐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 이를 불쌍히 여긴 그 마을에 전 서방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논둑에서 밥을 먹으려고 첫 숟가락을 뜨다가, 산허리에 불쌍하게 죽은 고씨네 무덤이 보이자 고씨네가 불쌍해서 ‘고씨네’ 하고 이름을 부르며 첫 숟가락의 밥을 무덤을 향해 던졌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전 서방네 농사가 갑절이나 잘 되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논이나 밭에서 음식을 먹을 때면 먼저 ‘고씨네’하고 첫술을 던졌고 그렇게 한 사람들은 모두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그 후 세상 사람들이 이를 본떠서 ‘고씨네’ 하는 말을 하면서 음식을 던졌는데, 이 말이 변하여 ‘고시레’로 부르게 되었다.
2. 무당의 고수릿대 설: 무당이 병 굿을 할 때 참나무 가지를 ‘고수릿대’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3. 고시래탈 설: 전통 가면 중 ‘고시래탈’이 있는데 단군시대 불 사용법과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준 ‘고시’씨를 형상화한 것으로, ‘고시’를 기리기 위하여 이런 풍습을 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4. 자손이 없는 고씨 성을 가진 사람의 덕을 기리기 위한 설: 옛날에 자손이 없고 부자인 고씨 성을 가진 사람이 가난한 사람들을 즐겨 돕다가 죽게 되었는데, 그 공을 기리기 위해서 고수레를 하기 시작했다는 설이다.
5. 양평 지역의 도손설: 고씨 성을 가진 처녀가 시냇물에서 떠내려 오는 복숭아를 먹고 아이를 낳아서 이름을 도손(桃孫)이라 하였는데, 이 아이가 풍수지리의 대가가 되었다. 훗날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후 자신이 정한 들판 명당자리에 어머니 묘를 썼는데, 이 들에 있는 어머니 묘를 돌본 사람에게 풍년이 들자 사람들이 그를 따라서 이 어머니의 묘를 돌보게 되었다는 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