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9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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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杜萬馨 |
영어음역 | Du Manhyeong |
이칭/별칭 | 경원(慶源),초당(草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채수환 |
[정의]
조선 후기 김제 지역에서 활동한 문인.
[가계]
본관은 두릉(杜陵). 자는 경원(慶源), 호는 초당(草堂).
[활동사항]
두만형은 1759년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시사천리에서 태어나, 34세 되던 1792년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 구미마을에 정착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 향리 유생들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후 해박한 지식과 문장이 정조에게 알려져 어전시재(御前試才)를 하였는데, 한 3각(限三刻)[1각은 15분]에 「불매청금약(不寐聽金鑰)」이라는 부(賦)로서 일백구(壹百句)를 거침없이 지어 바쳤다. 이에 정조가 “가위금지초당(可謂今之草堂)”이라 칭찬하면서 초당(草堂)이란 호를 지어 주었다. 또 병(屛)·필(筆)·연(硯)·묵(墨)을 하사한 데 이어 고부에 있는 전답 9백제(九佰堤)를 내려주고 치하했다고 한다.
두만형은 이렇듯 문장에만 재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학사상에 의한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여러 분야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당시의 부패한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어전상소문(御前上疏文)」 10장은 병기의 허술함에서 농어촌의 생활 문제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별로 열 가지 시정 사항을 상소한 것으로, 달관의 경륜과 우국충정의 지사적인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다. 말년에는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 구미마을을 떠나 장전마을에 초당을 짓고 산수를 벗 삼아 시를 지으며 살다가, 1817년 12월 11일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유고 시집으로 『화조소(花鳥笑)』가 전한다.
[상훈과 추모]
두만형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학덕을 숭모하는 후인들과 후손들이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 장전마을에 어필각을 건립하고 정조의 하사품을 보존해 왔으나 한국전쟁 중에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두만형의 5세손인 두팔성(杜八星)이 김제시 금구면 옥성리 사동마을에 살면서 『화조소』와 하사품인 『경림문희록(瓊林聞喜錄)』, 『은배시집(恩杯詩集)』 두 권을 가보로 보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