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9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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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賢燮 |
영어음역 | Jeong Hyeonseop |
이칭/별칭 | 화암(華岩),윤옥(允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교동월촌동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승대 |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정현섭(鄭賢燮)의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윤옥(允玉), 호는 화암(華岩)이다. 1896년 9월 14일에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교동월촌동에서 태어났다. 정화암(鄭華岩)이라고도 잘 알려져 있는데, ‘화암’은 중국에 건너가면서 부르게 된 호이다.
[활동사항]
1919년 고향에서 3·1운동에 참가하였다. 1920년 극동을 시찰하는 미국의원단의 한반도 방문 때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건의하려다 체포되어 곤욕을 치른 뒤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1923년 동방 아나키스트 조직위원이 되었으며, 1928년 이회영(李會榮)·신채호(申采浩) 등과 교유하면서 조국의 광복 운동은 혁명적 무력 투쟁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뜻을 모은 뒤 중국 국민혁명의 원로 리스쳉[李石曾]·우중후이[吳鍾暉] 등과 제휴, 동방자유혁명자연맹(東方自由革命者聯盟)을 조직하고 활동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30년 4월 20일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과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여 직접적인 무력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당시 중국에 머물던 무정부주의자 유기석(柳基石)을 만나고 유자명(柳子明)·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 등과 함께 활동하던 중, 1931년 1월 원심창(元心昌)이 상해에 오자 이를 계기로 조직을 강화하고 상해 일대에서 친일배 및 전향자 등을 색출, 사살하여 독립운동에 일대 활력을 불어넣었다.
1933년 3월 이강훈(李康勳)·원심창·백정기(白貞基)·유기문(柳基文)·이용준(李容俊)·진수방(陳樹芳)·전화민(田華民) 등과 규합, 상해해방연맹(上海解放聯盟)을 결성하였다. 1933년 3월 중순 일본 주중 상해공사 아리요시[有吉明]가 중국 유력자들을 육삼정(六三亭)에 초청하여 연회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본 공사를 사살하려고 계획하였으나 밀정의 보고로 거사 직전에 잡혔다.
1936년 국내에 있던 호서은행(湖西銀行)에서 탈취해 온 5만 7000원을 기금으로 기관지 『남화통신(南華通信)』을 발행하여 독립 사상을 고취하고 별동대 맹혈단(猛血團)을 편성하였다. 한편, 중국 항일 운동 세력과 연합하여 중한청년연합회(中韓靑年聯合會)를 조직하고 『항쟁시보(抗爭時報)』를 발간하였다. 1940년부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복건성(福建省) 내에서 이강(李剛)과 함께 광복군 활동의 현지 책임자를 지냈다.
특히, 이때 일본군의 수송로에 잠복하였다가 폭파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한편으로는 생포된 연합군 포로 구출 공작에도 공헌하였다. 또한, 일본군 내의 한국인 학도병 탈출 공작도 아울러 전개하였다. 8·15해방 후 귀국하여, 4·19혁명 후 통일사회당 정치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나의 회고록』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8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