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8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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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炳洙 |
영어음역 | Gim Byeongsu |
이칭/별칭 | 삼산(三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백구면 유강리 51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승대 |
성격 | 독립운동가|정치가|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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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김제시 백구면 유강리 51 |
성별 | 남 |
생년 | 1898년 10월 18일 |
몰년 | 1951년 5월 22일 |
본관 | 김해 |
[정의]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의사.
[개설]
김병수(金炳洙)의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삼산(三山)이다. 1898년 10월 18일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백구면 유강리 51번지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군산 지역의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서울의 남대문 정거장 앞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활동사항]
김병수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1919년 2월 25일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군산 지역의 만세 운동을 주도하라는 권유와 함께 200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전달 받고 이튿날 군산에 도착하였다. 이후 김병수는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 박연세(朴淵世)의 집에서 고석주(高錫柱)·김수영(金洙榮)·이동욱(李東旭)·이두열(李斗烈) 등과 만나 서울의 만세 운동 계획을 전하고, 이들에게 100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전해 준 뒤 지역민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함으로써 3월 5일 군산 지역에서 만세 운동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
군산 지역 시위 계획을 끝내자마자 곧바로 상경한 김병수는 3월 5일 남대문 정거장 앞에서 강기덕(康基德)·김원벽(金元璧) 등과 수백 명의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2월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3개월을 복역했다.
출옥 후 1921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김병수는 군산 야소교병원을 거쳐 다음해에 익산에 삼산의원(三山醫院)을 개원하였다. 그는 인술을 베풀고 사재를 털어 광희여숙을 설립하는 등 여성 교육에도 공헌하였으며, 28세 때는 익산제일교회 장로가 되어 교회에 유치원을 설치하고 익산청년회관도 건립하였다.
1945년 8·15해방 후 김병수는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 중 같은 해 9월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자 이에 항쟁하기 위하여 그 해 12월 이리·익산 독립촉성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회 전북지부 부위원장이 되고, 같은 해 9월에는 세브란스 재단법인 이사에 선출되었다.
1947년 3월 대한농민총연맹 전북위원장이 되고, 같은 해 4월 이리읍이 부(府)로 승격되자 초대 이리부윤에 취임하였다. 또 4월에는 대한농민총연맹전국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민주국민당 이리시당 부위원장, 1949년에는 민주국민당 전북당지부 최고위원이 되었다. 한국전쟁 때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동래 제5육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활약하다 유엔군의 진격과 함께 고향에 돌아와 구국총력연맹(救國總力聯盟) 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3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