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876 |
---|---|
한자 | 郭京烈 |
영어음역 | Gwak Gyeongryeol |
이칭/별칭 | 곽봉수(郭奉守)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채수환 |
성격 | 독립운동가 |
---|---|
출신지 |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
성별 | 남 |
생년 | 1901년 |
몰년 | 1968년 |
본관 | 현풍 |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곽경렬(郭京烈)의 본관은 현풍(玄風)으로, 1901년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에서 태어났다. 곽봉수(郭奉守)로도 불렸다.
[활동사항]
곽경렬은 1915년 15세의 어린 나이에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 등이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인사들을 통합하여 대구에서 조직한 혁명 단체로서, 전국적인 조직과 더불어 만주의 독립군 기지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졌던 1910년대 최대의 국내 항일 조직이었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혁명 기지를 확보한 후 폭동으로 독립을 쟁취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군자금 수합이 친일 부호들의 외면으로 예정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이로 인해 혁명 계획이 난관에 봉착하게 되자 친일 부호들을 처단하는 활동을 펴나가게 되었다. 곽경렬은 한훈(韓焄)·유장렬(柳璋烈) 등과 함께 전라도 일대에서 양재학(梁在學)·서도현(徐道賢) 등 한인 반역자를 처단하는 행형부(行刑部)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12월 11일, 곽경렬은 전라북도 옥구군 대야면 소산리에 있는 김영순의 집으로 들어가 상해 임시정부로 보낼 군자금을 받아 당시 화폐 27원을 연락원에게 전송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이 사실이 발각되었고, 결국 1924년 체포되어 2년여의 모진 고문 끝에 1926년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929년 4월 1일 전주감옥에서 나온 곽경렬은 일제의 고문으로 인해 병든 몸으로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였다. 1968년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