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7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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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義方 |
영어음역 | Yi Uiba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승대 |
[정의]
고려 후기 김제 출신의 어머니를 둔 집권 무신.
[활동사항]
본관은 전주(全州). 의종 말기에 산원(散員)으로 견룡행수(牽龍行首)를 지냈다. 1170년(의종 24) 보현원(普賢院)에서 대장군 정중부(鄭仲夫)·이고(李高) 등과 무인정변을 일으켜 성공한 뒤 응양용호군(鷹揚龍虎軍)의 중랑장에 임명되었다. 이 해에 이의방은 어머니의 고향이라고 하여 전주의 영현으로 있던 금구(金溝)를 현(縣)으로 승격시켰다.
1171년(명종 1) 이의방은 대장군 한순(韓順)과 장군 한공(韓恭)·신대예(申大譽)·사직재(史直哉)·차중규(車仲規) 등이 자신을 비방하자, 평소 친분이 있던 차중규는 귀양을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죽였다. 이즈음 함께 무인정변을 일으켰던 이고가 악소(惡少)[무뢰배]와 법운사(法雲寺)의 중 수혜(修惠), 개국사(開國寺)의 중 현소(玄素) 등과 결탁하여 분수에 넘치는 뜻을 나타내므로 그를 미워하게 되었다.
또 태자(太子)에게 원복(元服)을 가하는 잔치가 여정궁(麗正宮)에서 열리자 선화사(宣花使)로 참여하여 난을 일으키려 한 이고를 죽이고 순검군을 풀어 이고의 어머니와 여당을 잡아 죽였다. 하지만 이고의 아버지는 죽이지 않고 귀양을 보냈는데, 이는 일찍이 이고의 아버지가 이고의 불초함을 미워하여 자식으로 삼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1173년 어느 날 왕의 딸을 궁주(宮主)로 봉하는 축하연이 벌어졌는데, 이때 이의방은 벼슬이 위위경흥위위섭대장군지병부사(衛尉卿興威衛攝大將軍知兵部事)에 머물렀는데도 기생들을 데리고 중방(重房)에서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고 떠들며 북치는 소리가 대궐에까지 들려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거리낌이 없었다. 1174년(명종 4) 귀법사(歸法寺)의 중 100여 명이 성의 북문을 침범하여 승록(僧錄) 선유(宣諭)를 죽이자 병사를 거느리고 이들을 물리쳤다.
다음날 중광사(重光寺)·홍호사(弘護寺)·귀법사·홍화사(弘化寺) 등의 승려들이 이의방 형제를 죽이고자 침입을 하자, 부병을 모집하여 승려들을 죽이고 쫓아낸 뒤 성문을 수비하여 승려들의 성문 출입을 일체 금지시켰다. 또한 부병을 파견하여 그 절들을 허물려 할 때 형인 이준의(李俊儀)가 저지하며 “너에게 삼대악(三大惡)이 있으니, 그 하나는 임금을 쫓아내어 죽이고 그 저택과 희첩(姬妾)을 취함이요, 그 둘은 태후의 여동생을 위협하여 간통함이요, 그 셋은 국정을 마음대로 함이다.”라고 하자, 크게 노하여 형을 죽이려 하였으나 문극겸(文克謙)이 만류하자 그만두었다.
그 뒤 좌승선이 된 이의방은 1174년 3월에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올렸다. 그리하여 더욱 기세등등하여 국정을 함부로 하므로 정중부와의 사이도 나빠졌다. 그해 12월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이의방과 정중부를 토벌하기 위해 거병을 하였다. 이에 토벌군을 출동시키는 혼란 중에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의 명령을 받은 승려 종참(宗旵)에게 죽음을 당했다.
이때 이의방의 형제와 일파는 정중부에 의해 모두 살해당했고, 딸 역시 적신(賊臣)의 자식이라 하여 태자비에서 폐출되었다. 1176년(명종 6) 이의방의 문객들인 장군 이영령(李永齡), 별장 고득시(高得時), 대정 돈장(敦章) 등이 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정중부의 암살을 모의하다가 섬으로 추방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