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451 |
---|---|
한자 | 淸海鎭流民碧骨郡移住 |
영어의미역 | Moving People from Cheonghaejin to Byeokgol-gu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백덕규 |
[정의]
851년 문성왕이 청해진을 폐지하고 주민들을 전라북도 김제 지역에 강제 이주시킨 사건.
[개설]
청해진(淸海鎭)은 통일신라 때 장보고(張保皐)가 828년(흥덕왕 3) 지금의 완도에 설치하였던 해군·무역 기지이다. 이는 당나라 쉬저우[徐州]로 건너가 무령군소장(武寧軍小將)이 된 장보고가 중국인들이 신라 변방 사람들을 노비로 삼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귀국한 뒤에 이를 막기 위하여 청해진을 설치할 것을 왕에게 청함으로써 설치되었다.
[역사적 배경]
통일신라 후기 당나라와 신라는 모두 중앙집권력이 이완되어, 흉년과 기근이 들면서 각지에서 잇달아 도적이 횡행하였다. 해적이 신라 해안에 출몰하여 많은 주민들을 포획하여 중국의 노예로 팔았으며, 무역선도 해적의 위협을 받았다. 마침내 왕에게 남해의 해상교통 요지인 완도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여 황해의 무역로를 보호하고 해적을 근절시킬 것을 주청하여 청해진이 설치되었다. 청해진이 건설된 후로는 장보고가 해적을 소탕하여 동중국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이 해상권을 토대로 당과 신라, 그리고 일본을 잇는 국제 무역을 주도해 나갔다.
[목적]
당시 서남해안 지역의 정서는 장보고가 국왕을 대신하여 백성들의 우상으로 추앙 받을 정도로 장보고의 위상이 높았다. 이에문성왕은 청해진을 혁파하고 주민을 이주시키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발단]
장보고는 강력한 군대와 많은 선박을 보유하고 부를 축적하여 하나의 큰 지방 세력으로 성장함에 따라 자연 중앙 정부의 정치적 분쟁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836년(흥덕왕 11) 수도에서 왕위 계승 분쟁에 패배한 김우징(金祐徵)[후에 신무왕] 일파가 청해진으로 피난하여 그에게 의탁하였다. 이어 838년(희강왕 3) 수도에서 재차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터져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였다.
이 정변을 틈타 장보고는 김우징 일파를 강력히 지원하여 군대를 보내어 경주로 반격하게 하였고, 김우징이 왕으로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신무왕(神武王)은 그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았으나 그의 세력은 중앙 정부를 위협할 정도가 되었고, 이에 두려움을 느낀 중앙 귀족들은 그의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맞아들이는 것을 반대하였다.
[경과]
이후에도 청해진과 중앙 정부 사이에는 대립과 반목이 심화되어 갔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閻長)을 보내어, 짐짓 그의 막하에 투항한 척하다가 846년 그를 암살하게 하였다. 장보고가 죽은 뒤 부장 이창진(李昌珍)에 의해 청해진 세력은 얼마간 유지되었으며, 일본에 무역선과 회역사를 보내어 교역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결과]
846년 장보고가 죽고 염장이 청해진을 운영하는 동안 당과의 교역은 거의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교역이 축소되자 청해진은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더불어 청해진이 또 다른 반란 세력으로 대두될 수 있다는 판단과 함께 염장의 중앙 정치 진입을 막기 위해 851년(문성왕 13) 문성왕은 청해진 및 인근 주민 약 10만 여 명을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청해진을 폐지하였다.
[의의와 평가]
벽골군에 강제 이주된 장보고 휘하 백성들은 인근 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신라 정권에 대한 반감이 가시기 전에 견훤이 서남해 지역의 해상 방위 책임자로 임명되었는데, 견훤은 서남해안 해상 방위 활동을 하면서 지역의 정서가 신라 정권에 반대한다는 것을 감지하고 뜻을 규합하여 후백제를 건국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