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4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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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辟卑離國 |
영어음역 | Byeokbiri-gu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 |
집필자 | 백덕규 |
[정의]
전라북도 김제 지역에 있던 마한 54소국의 하나.
[개설]
벽비리국의 ‘비리’라는 말은 비리국(卑離國)·고비리국(古卑離國)·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내비리국(內卑離國) 등 마한의 소국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는 백제의 부리(夫里)와 신라의 벌(伐)·불(弗)·불[火]처럼 평야, 읍락, 나라 등의 뜻을 지니는 말이다.
[제정경위 및 목적]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따르면 마한에는 54개의 소국이 분립하고 있었다. 마한이라고 부르는 정치 세력의 등장 시기는 일정하지 않지만 충청남도 지역의 경우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상당히 발달된 청동기 문화를 영위한 세력들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기반 위에 기원전 2세기 초 한반도 서북부의 주민 집단 일부가 고조선 내부의 세력 교체와 관련해 남하해 온 것이 이 지역 토착 사회의 성장에 일정한 자극제가 되었다. 이후 수세기 동안 북방으로부터 많은 유민 및 이민이 파상적으로 남하해 토착 세력과 투쟁, 연합하는 과정에서 여러 정치 집단들 간의 정치적, 경제적 결합이 촉진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벽비리국이다.
[관련기록]
2세기 무렵의 벽비리국에 대해 중국의 역사책인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위지」 동이전의 한전(韓傳)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마한은 54개의 나라로 나뉘어져 있고, 크기는 수천 가구에서 1만여 가구에 이르렀다고 한다.
[내용]
벽비리국은 664년 당나라가 백제 고지에 구획한 주현(州縣) 가운데 고사주(古四州)[현재의 고부]의 속현 조항에 보이는 벽성현에 해당되거나, 백제 때 파부리현인 지금의 보성군으로도 추측된다.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마한의 54소국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중 비리국·감해국·고비리국·벽비리국·모로비리국·고랍국·임소반국·불사분사국·건마국·초산도비리국·여래비리국 등이 전라북도에 위치하고 있었다.
벽비리국을 포함한 마한의 소국은 주로 해안이나 하천 유역에서 농사에 편리한 여건을 기반으로 성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벽비리국의 사회와 문화 형태는 목지국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진왕(辰王)은 목지국에 도읍하고 그들은 벼농사와 누에치기와 방직을 알고 있으며, 읍락은 질서가 없고 성곽은 없으며 흙집에서 살았다. 소나 말을 타는 방법을 몰랐고, 금보다 진주를 귀하게 여겨 옷에 달거나 목걸이 귀걸이로 장식하고 짚신을 신었다.
5월에 파종이 끝나면 귀신을 섬기고 한곳에 모여서 술과 춤으로 새우고 10월에 수확이 끝나면 역시 그와 같이 하였다고 하는 것을 보아 벽비리국 또한 이와 유사한 문화와 풍습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여러 국읍에는 한 사람의 천신왕제자(天神王祭者)가 있어 이를 천군이라 부른다. 또 소도(蘇塗)를 세워 큰 나무 위에 방울을 걸고 귀신을 섬긴다고 하였다.
[변천]
벽비리국은 664년 당나라가 백제 땅에 구획한 주현 가운데 고사주의 속현 조항에 보이는 벽성현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벽비리국은 마한 연맹체의 일원으로 맹주국인 목지국과 여러 가지 형태의 결속 관계를 성립하면서도 토착적인 세력 기반을 그대로 유지한 채 4세기 중엽까지 지속적인 성장을 하다 백제국에 복속되었다.
또한 백제 때 벽비리국이 벽골군으로 명명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김제의 백제 때 이름이 벽지산 또는 벽성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백제 부흥 운동의 근거지였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가 멸망하고 벽골군이 당의 속령에 포함되었을 때는 벽성으로 개칭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비로소 김제군으로 개칭되었다.
[의의와 평가]
벽비리국은 삼한시대 마한의 영토로서 꾸준한 자기 성장을 거듭하여 4세기 중엽까지 독립을 유지할 정도로 성장한 나라였다. 현재 전라북도 김제시의 정체성 및 정신적 근원으로서의 상징성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