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5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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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德裕山 義兵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하지영 |
[정의]
개항기 경상남도 거창 지역 덕유산에서 활동한 의병 부대.
[개설]
을사늑약 체결 후 덕유산을 배경으로 경상남도과 전라북도, 충청북도 접경 지대에서 활약한 의병 부대로, 김동신과 문태수 의병 부대가 대표적이다.
[역사적 배경]
러일 전쟁과 을사늑약의 체결로 이어지는 일제의 국권 침탈이 가속화되자 이에 반대하는 의병이 전국적으로 크게 일어났다. 거창 등의 경상남도 서부 지역에서는 덕유산과 지리산 등 산악 지대를 배경으로 유격전 형태의 의병 운동이 전개되었다. 전국의 많은 의병들이 덕유산으로 이동해 와 덕유산 의병 부대를 조직, 일본군과 맞써 싸웠다. 이들의 활동은 1907~1908년에 절정에 달하였다.
[경과]
덕유산 의병의 대표적인 인물은 김동신과 문태수였다. 본래 고광순·기우만 등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 내장산 백양사에서 의병을 일으킨 후 덕유산과 지리산을 배경으로 각종 투쟁을 전개하던 김동신은 스스로 ‘삼남 의병 대장(三南義兵大將)’이라 칭하며 각지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한때 김동신의 의병 부대는 1,000명에 달하였고 김동신의 부하 장수들도 각각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김동신은 1908년 3월 거창군 고제면 매학 전투 후 신병으로 고향인 충청남도 회덕으로 내려가 도피 생활을 하다가 대전 경찰서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김동신 사후 덕유산 의병을 지휘한 사람은 문태수이다. 1905년 지리산에서 의병을 일으킨 문태수는 1907년 이후 덕유산을 근거로 삼아 삼남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1907년 12월 각도 의병 부대가 서울을 총공격하려고 할 때 호남군 100명을 이끌고 참가하여 13도 연합 의병 부대 중 호남 창의 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총대장인 이인영이 아버지 상 때문에 귀향하면서 서울 진격 계획이 좌절되자 다시 무주로 돌아왔는데, 11월 이후로는 전라북도 무주군을 근거로 하여 금산, 영동, 옥천, 상주, 청주, 보은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이 외에 유종환 부대 100명, 최창근 부대 50여 명, 성문길, 차은표 부대 500명, 오대권 부대 30여 명, 국인묵, 임병주 부대 1,000여 명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접경지대를 중심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덕유산 의병의 주된 공격 대상은 일본군, 일본군 헌병, 일제 경찰, 일본인이었다. 덕유산 의병이 일제와 맞서 벌인 대표적인 전투로는 1907년 9월 4일의 월성 전투, 12월 안성 전투, 1908년 3월 고제 매학 전투, 4월 가북 몽석 전투 등이 있다. 1908년 12월경에는 문태수, 염도중 등의 의병장이 지휘하는 의병 약 1,000여 명이 속리산 일대와 덕유산의 거창, 안의, 무주, 진안, 장수에 포진하며 일본군과 맞섰다.
[결과]
덕유산 의병과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자 일본군은 1908년 4월 13일 합천에 있던 보병 제14연대 7중대 주력을 거창으로 옮기고 1908년 5월 10일 덕유산 주변 거창과 무풍의 의병을 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여러 의병장들이 체포되었다. 1909년 접어들면서 의병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는데, 우월한 무기를 가진 일본 정규군과의 지속적인 전투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때부터 의병은 소규모 부대를 편성하여 유격 전술로 일본군과 대적하였는데, 투쟁의 양상도 공세적 성격에서 방어적인 성격으로 바뀌어 갔다. 김동신 덕유산 의병 부대의 선봉장으로 월성 전투를 벌였던 유종환은 1909년 4월 유격 활동 중 일본군 수색대의 공격을 받아 붙잡혔다. 문태수 의병장은 1910년 서울로 진격하고자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다시 덕유산으로 돌아와 재기를 꾀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 서상면장의 고발로 1911년 8월에 안의 헌병대에 붙잡혔다. 대구 감옥에서 서울로 옮겨진 뒤 1913년 2월 경성 감옥에서 자결하였다.
[의의와 평가]
김동신과 문태수를 주축으로 한 덕유산 의병은 1907년 8월 군대 해산 이후 활성화된 호남 의병 운동의 배후지로서 그 지원 세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상남도 지역에서 반일 의식을 고취시키는 데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특히 산악을 근거로 한 유격 투쟁의 성격이 강한 이들의 의병 투쟁은 여러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겨가며 ‘한일 합병’ 직전까지 장기간에 걸친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는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지역의 민족 해방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