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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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나각순 |
[정의]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지역의 역사.
[개설]
조선 시대의 지방제도는 전국의 행정구역을 8도로 나누어 관찰사를 두고, 그 예하에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도호부(都護府)·군(郡)·현(縣) 등을 설치하여 운영되었다. 일반적으로 군현제를 실시하였다고 한다. 이들 지방장관인 각 수령(守令)들은 행정상 모두 병렬관계를 가지고 관찰사의 관할 아래 있었다. 단지 수령이 겸임하는 군사직을 통하여 상하의 명령계통이 체계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각 고을과 수령의 계층적 차등 편제는 고을의 크기나 인구·호수의 다소, 또는 전결의 규모에 따라 이루어졌다.
한편 지방관들은 관내의 행정·사법·군사의 실제 통치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농상성(農桑盛)·호구증(戶口增)·학교흥(學校興)·군정수(軍政修)·부역균(賦役均)·사송간(詞訟簡)·간활식(奸猾息) 등 수령칠사(守令七事)를 주 임무로 하였다. 그리고 국가권력과의 관계에서 수령칠사를 잘하여 조세·공물의 징수와 상납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직무였다. 이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중앙의 육전체제(六典體制)를 따른 이·호·예·병·형·공방의 육방(六房) 조직을 갖추었으며, 그 사무는 토착 향리(鄕吏)들이 향역으로 세습하면서 답습하였다.
한편 각 고을은 대체로 자연마을의 지역단위인 면·리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들은 민간출신 자치행정적 기능을 가진 면임(面任)·이장(里長)들에 의해 임의의 행정이 이루어졌으며, 수령의 지시로 정령(政令) 전달과 부세(賦稅) 독촉 등 임무를 수행하였다.
강남구 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광주는 조선 중기까지는 23개 면을 포용하는 경기도 내의 가장 큰 고을이었다. 이곳은 조선 시대 말까지 군사기지로 주목을 받았으며, 남한산성(南漢山城)은 전란 때마다 격전지 방어성이 되었다. 따라서 조선 7대왕인 세조는 이곳에 진(鎭)을 설치하였고, 광주목 소속 진관(鎭管)으로 여주목·이천도호부·양근군과 현으로 음죽·지평·양지·죽산·과천 등 5개 고을을 편제시키기도 하였다. 연산군 11년 이 고을 사람의 난언(亂言)으로 광주가 혁파되기도 하였으나, 중종반정으로 다시 목사를 두었다. 선조 때는 부윤으로 승격되어 토포사를 겸하였으며, 1623년(인조 1)에는 유수(留守)로 승격되어 수어사(守禦使)를 겸하기도 하였다. 광주부윤이 겸하였던 토포사의 관할영역은 양주·영평·포천·가평·양근·과천·금천에 이르렀으며, 영장의 소속 고을로는 이천·용인이 해당되었다. 당시 광주부의 방리(坊里)는 경안면·오포면·도척면·실촌면·초월면·퇴촌면·초부면·동부면·서부면·구천면·중대면·세촌면·돌마면·낙생면·대왕면·언주면·의곡면·왕륜면·일용면·송동면·월곡면·북방면·성곶면 등 23개 면이었으며, 뒤에 일용면과 송동면은 수원부에 편입되었다.
이때 현재의 강남구는 광주부의 언주면과 대왕면에 해당되었다. 언주면·대왕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데, 영조(英祖) 35년(1759)의 『호구장부』에 보면, 광주부 언주면의 신원리·역촌리·양재리·방하교리·포전리·무동도리·청담리·부로도리·반곡리·압구정리·논고개리·저자도리의 12개리(里), 대왕면의 노상리·송현리·사촌리·둔촌리·노하리·고산리·신곡리·세천리·지곡리·율현리·자양동리·수동리·궁촌수서동리·일원동리·둔전리·등자리·오야곡리의 17개리(里)가 보인다. 30년 후인 정조(正祖) 13년(1789)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대왕면에 사촌리 하나가 더 보인다.
1836년(헌종 2)의 기록인 『중정(重訂) 남한지(南漢志)』에 보면 광주부 관할 21개 면이 보인다. 1906년에는 광주군이 되어 한성부 관할이 되었으며, 1910년에 중부면이 설치되면서 군청을 중부면 산성리에 두었다.
한편 조선 시대 강남구에 해당되는 지역의 호구를 살펴보면, 1759년(영조 35)의 언주면 호구는 864호에 4,405명이었고, 대왕면은 776호에 3,733명이었다. 1798년(정조 13)의 경우 언주면은 723호에 3348명이었고, 대왕면은 701호에 4,040명이었다. 1836년(헌종 2)에는 언주면은 738호에 3,256명이었고, 대왕면은 772호에 3,771명이었다.
조선 시대 강남 지역은 한강변을 중심으로 농업 위주의 경제생활을 영위하였으며 수산업에도 종사하였다. 특히 압구정 앞 한강에서 나오는 민물게[蟹密魚]는 궁중에 바치는 특산물로 유명하였다. 과실로는 앵두[櫻桃]가 유명하였다. 조선 후기에 장시로 사평장(沙平場)이 있었는데, 사평도(沙平渡)를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어 육의전 상인을 위협하기도 하였으나 그 실세는 송파장(松坡場)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교통수단으로 역원제도가 운영되었는데, 강남구 지역에는 한강 조운로(漕運路)가 통하는 지역으로 삼남으로 연결되는 양재역(良才驛)이 있었으며 한강 남안에 사평원(沙平院)이 운영되었고, 그 변형 형태인 참점(站店)으로 신원점(新院店)과 율현점(栗峴店) 등이 있었다.
한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는 조선 시대 승과(僧科)를 실시하여 휴정(休靜)[서산대사]·유정(惟政)[사명당 송운대사] 등 저명한 승병장을 배출하였다. 또 조선 왕실의 가계가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데[宗系辨誣] 기여한 통역관 홍순언(洪純彦)의 출신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종과 정현 왕후의 선릉과 중종의 정릉(靖陵)를 비롯한 세종의 5남 광평 대군의 묘역이 자리 잡고 있어 조선 왕조의 능침공간으로도 중요한 무대였음을 알 수 있다.